23회 쓸모로 나를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
23일 차.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이 두려웠다
재직 시절, 회사 선배의 소개로 A사장님을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점심 식사 자리에서 A사장님이 제가 친하게 지내던 B상무님과 함께 근무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세 사람이 함께 식사하자는 약속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해임 통보 이후, 약속한 날짜가 다가오자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그날이 가까워질수록, 만남 자체보다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제 자신’이 더 부담스러웠습니다.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고,
특히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은 더 부담스러웠습니다.
이제는 제가 회사를 떠난 상태였고,
그분께 도움을 드릴 수 없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사람’이 아니라 ‘쓸모’를 기준으로 저를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B상무님께 전화를 드렸습니다.
현재 상황을 이미 알고 계셨던 분이었습니다.
“요즘 저의 상황이 이래서요. 약속은... 조금 어려울 것 같습니다.”
잠시 침묵이 있었고,
B상무님은 오히려 웃듯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럴수록 더 지켜야죠.
오히려 약속을 안 지키는 게 더 이상합니다.”
신분이 바뀌었다는 이유로 만남을 피하는 것이
상대에게는 더 어색할 수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결국 점심으로 약속을 바꾸어,
세 사람은 예정대로 만났습니다.
예상과 달리 분위기는 편안했고,
우리는 생각보다 많이 웃으며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A사장님은 제가 잘 알고 지내던 S대표님과도 인연이 깊은 분이었습니다.
식사 자리에서 A사장님은
S대표님과의 자리를 한 번 마련해 달라고 말씀하셨고,
저는 그 제안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습니다.
며칠 뒤, 세 사람의 저녁 자리는 제가 주도해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이상하게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해결해 주어서가 아니라,
여전히 관계의 한 축으로 남아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아직 예전의 제가 아니었지만,
그날 이후로는, 완전히 사라졌다고 느끼지는 않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