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이 아니라, 구분이었다

20회 모든 관계를 지킬 필요는 없었다

by 베풂과 행복

20일 차. 도망이 아니라, 구분이었다


퇴임 이후 모든 관계가 불편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전에 함께 고생했던 직원들, 마음이 통하던 몇몇 직원들과는 지금도 편하게 만나고 있습니다. 그들 앞에서는 제 상황을 숨기지 않습니다. 그냥 백수라고 말하고, 별일 없이 지낸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말이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문제는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같은 조직에 있었지만, 삶을 대하는 태도가 전혀 달랐던 사람들입니다. 일보다 정치가 앞섰고, 성과보다 눈치를 먼저 살폈던 얼굴들. 회사보다 개인의 이익에 더 민감했던 사람들입니다.


퇴임 이후, 이제는 그 얼굴들을 굳이 마주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조금은 편안했습니다. 전화가 와도 받지 않아도 되고, 만나자는 연락에 응하지 않아도 됩니다.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그날 이후로 관계를 대하는 방식을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모든 사람을 같은 마음으로 대하려 애쓰지 않기로 했습니다. 편한 사람은 편하게, 불편한 자리는 무리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이것은 도망이 아니라, 구분이었습니다.
예전에는 사람을 가려 만나는 것이 어른스럽지 못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게 느껴집니다. 이 시기에는, 무엇보다 저 자신을 지키는 일이 먼저였습니다.


지금의 저는 회복 중입니다.

모든 관계를 잘 유지해야 할 이유는 없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필요한 관계만 곁에 두어도 충분합니다. 퇴임 이후의 삶은 사람을 다시 정리하는 시간이었고, 저는 그 첫 단계로 사람을 구분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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