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의 대학생에게 '외식'이란 학교 앞 제육덮밥이나 호프집 소세지 야채볶음이 전부였다. '레스토랑'이라는 곳은 TV 드라마에서나 나오는, 나와는 다른 세상 사람들이 가는 곳인 줄만 알았다.
그녀가 나를 이끌고 들어간 곳은 대학로 구석에 숨겨져 있던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입구부터 주눅이 들었다. 웨이터들의 정갈한 유니폼, 은은한 클래식 음악, 그리고 메뉴판에 적힌 낯선 외국어들.
"누나, 여기... 비싸지 않아요?"
내 귓속말에 그녀는 풋 웃으며 팔짱 낀 손에 힘을 주었다.
"호준 씨가 걱정할 만큼 비싸진 않아요. 오늘은 내가 사는 거니까, 걱정 말고 들어가요."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펼쳤지만, 까막눈이 된 기분이었다. 돈가스나 함박스테이크 같은 익숙한 단어는 없었다. 식은땀이 흘렀다. 스무 살 남자의 자존심상 "모르겠다"는 말은 죽어도 하기 싫었지만, 엉뚱한 걸 시켜 망신을 당하느니 솔직한 게 낫겠다 싶었다.
"저기... 누나. 사실 저 이런 곳 처음이라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누나가 대신 시켜주세요."
얼굴이 화끈거려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한심해 보이겠지? 촌놈이라고 비웃으려나? 하지만 그녀의 반응은 의외였다.
"사실... 나도 처음 와봐요."
"네?"
"친구가 추천해 준 곳이거든요. 호준 씨가 솔직하게 말해주니까 나도 마음이 편하네. 아, 창피해라!"
그녀가 혀를 살짝 내밀며 웃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 여자는 나를 무시하거나 가르치려 드는 '어른'이 아니라, 나와 같은 눈높이에서 호흡해 주는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는 추천받은 스테이크와 와인을 주문했다. 문제는 와인이었다. 웨이터가 와인을 가져다주자, 나는 TV에서 본 건 있어서 호기롭게 "제가 따겠습니다"라고 나섰다. 코르크 마개에 오프너를 꽂고 돌리는 것까진 좋았다. 하지만 아무리 힘을 줘도 코르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낑낑대며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갈 때쯤, 지나가던 웨이터(젠장맞게도 아주 잘생긴)가 다가와 우아하게 뽕, 하고 따주었다.
"감사합니다..."
기어들어 가는 내 목소리에 그녀가 킥킥거렸다.
"호준 씨, 귀여워요. 억지로 어른 흉내 안 내도 돼요. 편하게 해요, 이호준답게."
와인 잔을 부딪치며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알코올이 들어가니 긴장이 풀리고, 궁금했던 질문이 툭 튀어 나왔다.
"누나는 나이가 어떻게 돼요?"
내 질문에 그녀가 멈칫했다. 와인 잔을 돌리던 손길이 멈췄다.
"몇 살처럼 보여요?"
"음... 제가 워낙 노안이라... 저보다 어려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많아 봐야 스물다섯?"
사실이었다. 그녀는 정말 동안이었다. 내 말에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어머, 고마워라. 그런데 호준 씨... 놀라지 마요."
"네?"
"나, 호준 씨보다 열 살 많아요. 서른이에요."
순간 멍해졌다. 열 살? 30? 내 나이 스물에 더하기 십. 초등학교 때 내가 구구단을 외울 때 이 누나는 대학생이었다는 소리다. 계산이 잘 안 됐다.
"우와... 진짜 동안이네요. 그런데 열 살 차이면 누나가 아니라 이모 아닌가?"
당황스러움을 감추려 나도 모르게 짓궂은 농담을 던졌다.
"이모? 야! 이호준!"
그녀가 눈을 흘기며 소리쳤다.
"농담이에요, 농담. 그럼... 정아 이모?"
"죽는다, 진짜?"
우리는 마주 보고 한참을 웃었다. 10년이라는 세월의 벽이 '이모'라는 농담 한 마디에 와르르 무너져 내린 기분이었다.
"좋아요. 그럼 이제 말 놓을게요. 누나라고 부를 테니까, 누나도 저한테 말 놔요."
"어떻게 그래... 호준 씨가 어려워할까 봐..."
"열 살 차이에 존댓말 들으면 진짜 이모 같아서 그래요. 말 놔, 누나."
"알았어... 호준아."
그녀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편하게 불렀다. '호준아'. 그 호칭이 내 심장에 박혔다. 단순히 아는 동생을 부르는 게 아니라, 남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럼 나도 하나 물어보자. 호준이는 이상형이 어떻게 돼?"
그녀가 장난스런 눈빛으로 물었다. 나는 와인 잔을 만지작거리며 그녀를 똑바로 쳐다봤다. 술기운인지, 객기인지 모를 용기가 솟았다.
"내 이상형?"
"응."
"내 이상형은...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정아 누나."
그녀의 얼굴이 와인 빛보다 더 붉게 물들었다. 1996년의 봄, 그렇게 스무 살의 나는 서른 살의 그녀에게 푹 빠져들고 있었다.
작가후기~
안녕하세요. 실화를 바탕으로 에세이? 혹은 소설? 처럼 쓰고 있는 작가 입니다.
브런치를 처음 해봐서 적응이 안되네요^^
그래도 글이 올라갈 때 마다 핸드폰에서 울리는 진동은 기분이 좋습니다.
항상 성실 연재 하려고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글의 이미지들은 ai로 작업 한 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