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2월 14일. 밸런타인데이. 광주천변의 바람은 아직 찼지만, 내 마음은 뜨거웠다. 나는 아침 일찍 광주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서울행 티켓을 끊었다. 왕복 차비를 계산하고 나니, 주머니 속 쌈짓돈은 정말 바닥을 보였다.
사실 며칠 전부터 고민이 많았다. 누나는 분명 비싼 걸 준비했을 텐데... 내 지갑 사정은 '보릿고개' 그 자체였다. 백화점 선물은커녕, 서울 가는 차비 마련하기도 벅찬 현실. 하지만 빈손으로 갈 수는 없었다. 내가 줄 수 있는 건 시간과 정성, 그리고 '목소리'뿐이었다.
나는 꼬박 사흘 밤을 새워 **'세상에 하나뿐인 믹스테이프'**를 만들었다. 전람회의 <취중진담>, 이소라의 <기억해 줘>... 곡 사이사이에는 오글거림을 꾹 참고 내 목소리로 내레이션도 녹음했다.
4시간을 달려 도착한 서울 강남 고속버스터미널.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매캐한 서울 공기가 코를 찔렀다. 약속 장소인 터미널 근처 카페. 그녀는 등장부터 남달랐다. 세련된 코트에 명품 쇼핑백을 들고 나타난 그녀.
"야, 김호준! 너 미쳤어? 차비도 없을 텐데 여길 뭐 하러 올라와!"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등짝부터 때렸지만, 입가에는 숨길 수 없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자, 받아. 밸런타인데이 선물이랑, 곧 개강이지? 학교 가서 기죽지 말고 다니라고."
그녀가 내민 쇼핑백에는 고급 수제 초콜릿 세트와, 꽤 비싸 보이는 가죽 지갑이 들어 있었다.
"너 지갑 다 떨어져서 너덜너덜하더라. 여기에 돈 많이 채워서 나중에 맛있는 거 사줘."
순간, 주머니 속에 든 내 카세트테이프가 화석처럼 딱딱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번쩍이는 가죽 지갑 옆에, 플라스틱 케이스에 담긴 내 믹스테이프는 너무나 초라해 보였다.
"고마워... 진짜 예쁘다."
나는 쭈뼛거리며 내 선물을 테이블 위에 꺼냈다.
"난... 이거밖에 못 준비했어. 차비 빼니까 남는 게 없어서..."
그녀는 테이프를 집어 들었다. 투명 케이스 안에 삐뚤빼뚤한 글씨로 적힌 트랙 리스트.
[To. My Love. 호준이가]
그녀는 한참 동안 그 테이프를 바라보더니, 피식 웃으며 가방에 소중히 넣었다.
"야, 요즘 세상에 누가 이런 걸 만드냐? 진짜 아날로그다, 김호준."
"별로야? 버려도 돼..."
"누가 버린대? 차에 가서 바로 들어볼 거야. 내레이션 이상하게 했으면 죽는다?"
우리는 그녀의 프라이드 차 안으로 자리를 옮겼다. 터미널 주차장이었다. 그녀가 카세트 데크에 테이프를 밀어 넣었다. 철컥. 지지직거리는 노이즈와 함께, 서툴지만 진심이 담긴 내 목소리가 차 안을 가득 채웠다.
노래가 흐르는 동안, 그녀는 말이 없었다. 운전석에 앉아 핸들을 만지작거리던 그녀의 어깨가 조금씩 들썩였다. 이소라의 노래가 끝날 때쯤, 그녀가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광주에서 이거 주려고 온 거야? 바보같이..."
그녀는 젖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비싼 지갑보다 이게 백 배는 더 비싸네... 나중에 돈 많이 벌어도, 이런 건 계속 해줘야 돼? 변하면 안 돼."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당연하지. 할머니 돼도 만들어 줄게."
다시 광주로 내려가야 하는 막차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 어떤 데이트보다 진한 여운이 남았다.
그날 밤, 내려가는 고속버스 안에서 나는 그녀가 사준 새 지갑에 내 학생증과 그녀의 증명사진을 가장 먼저 끼워 넣었다. 비록 지갑 속은 텅 비어 있었지만, 마음만은 세상 어느 부자보다 꽉 차 있었던 1997년의 2월. 우리는 그렇게 서울과 광주의 거리를, 서로의 빈틈을 채워가고 있었다.
작가 후기 입니다.
현생이라는 벽은 제 체력을 방전 시키고 말았습니다.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