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로 내려오는 기차 안에서 했던 비장한 다짐. "반드시 성공해서 누나를 호강시켜 주겠다"는 그 맹세는 진심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다짐을 했다고 해서 다음 날 내 통장 잔고가 늘어나는 건 아니었으니까. 여전히 나는 가난한 연극영화과 학생이었고, 그녀는 격무에 시달리는 직장인이었다.
1996년 12월이 되었다. 거리마다 머라이어 캐리의 캐럴이 울려 퍼질 때, 나는 고민에 빠졌다. '성공은 먼 미래의 일이고... 당장 이번 첫 크리스마스엔 뭘 해줄 수 있지?'
그녀의 퉁퉁 부은 다리와, 얇은 코트 자락이 떠올랐다. 거창한 명품 백은 못 사줘도, 따뜻하게 감싸줄 무언가는 해주고 싶었다. 부모님께 손 벌린 돈이 아니라, 오롯이 내 땀방울로 번 돈으로 말이다. 그것이 내 다짐의 첫 번째 실천이었다.
기말고사가 끝나자마자 나는 시내 길거리에서 '크리스마스 카드 판매' 좌판을 깔았다.
"메리 크리스마스! 카드 사세요!"
찬 바람에 코가 빨개지고 손이 터도, 언젠가 그녀의 목에 둘러줄 빨간 목도리를 생각하면 견딜 만했다.
며칠 뒤, 나는 들뜬 목소리로 공중전화를 걸었다.
"누나, 나 이번 크리스마스에 올라갈게. 줄 것도 있고..."
하지만 수화기 너머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호준아, 이번엔 그냥 내려오지 마. 나 너무 힘들어."
"어? 왜... 우리 첫 크리스마스인데."
"병원 제일 바쁜 시즌인 거 알잖아. 나 3교대 당직이라 너 챙길 여력 없어. 와봤자 얼굴도 제대로 못 봐."
서른 살 직장인의 건조한 거절.
예전 같았으면 "사랑이 식었네" 하며 투정 부렸겠지만, 이번엔 달랐다. 그녀가 오지 말라는 건 정말 싫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지친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더더욱 가야 했다. 가서 위로가 되어줘야 했다.
12월 24일 이브, 나는 그녀 몰래 상경을 감행했다. 내 땀으로 산 빨간 목도리와 케이크를 들고.
'가서 놀자고 조르는 게 아냐. 그냥 따뜻하게 안아주고만 오는 거야.'
하지만 서울에 도착하자마자 예상치 못한 복병이 터졌다. 터미널 공중전화에서 삐삐를 치려는데, 신호음만 계속 가고 연결이 되지 않는 것이다.
[통화량 폭주로 인해 연결이 지연되고 있습니다...]
1996년 크리스마스 이브. 전국의 연인들이 동시에 사랑을 속삭이려다 통신 서버를 다운시켜버린 전설의 '96년 통신 대란'이었다.
'하... 하늘도 무심하시지.'
나는 무작정 병원으로 향했다. 로비는 북새통이었고, 그녀가 어느 병동에 있는지도 모르는 나는 하염없이 로비 구석 의자에 앉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저녁 6시, 8시, 10시... 케이크 상자는 사람들에 치여 조금씩 찌그러져 갔고, 내 속은 타들어 갔다.
'그냥 말들을 걸 그랬나. 이것도 결국 내 욕심인가.'
저번에 다짐이 무색하게, 나는 또 그녀에게 짐이 되는 건 아닌가 하는 자책이 들 때쯤이었다.
자정이 거의 다 되어서야 기적처럼 삐삐가 울렸다. [1004 - 8282] (천사 빨리빨리)
급하게 공중전화로 달려가 통화를 했다.
"너 어디야! 설마 진짜 올라온 거야?"
"응... 병원 로비..."
잠시 후,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그녀가 뛰어왔다. 하얀 가운을 입은 그녀는 머리가 헝클어진 채 헐레벌떡 나를 찾고 있었다. 화낼 줄 알았던 그녀는,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나를 보자마자 눈가가 그렁그렁해졌다.
"이 바보야! 연락 안 돼서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알아? 밥도 안 먹고 기다린 거야?"
"누나... 메리 크리스마스."
나는 찌그러진 케이크와 빨간 목도리를 내밀었다.
"이거 사주려고 알바했어. 누나 추위 많이 타잖아."
그녀는 멍하니 목도리를 바라보더니,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내 차가운 볼을 감싸 쥐었다.
"진짜 못 말린다. 너 때문에 내가 미쳐."
우리는 병원 앞 벤치에 앉아 찌그러진 케이크에 초 하나를 켰다. 화려한 파티도 없었지만, 그녀가 내가 사준 목도리를 두르고 환하게 웃는 그 순간. 내가 흘린 땀방울이 헛되지 않았음을 느꼈다.
"내년엔 돈 더 많이 벌어서 더 좋은 거 해줄게. 진짜야."
"됐어. 그냥 옆에만 있어. 사고만 치지 말고."
1996년의 겨울, 통신망은 마비됐지만, 남자가 되려고 노력하는 나와 그런 나를 안아주는 그녀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작가 후기.......
현장일하고 와서 피곤하네요.
하아.......그래도 한 편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