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자타 Mar 15. 2022

'엄마'라는 계보

『대불호텔의 유령』

강화길(2021), 『대불호텔의 유령』, 문학동네



기억은 불안하고 불완전하다. 내 머릿속에선 사진처럼 선명한데, 누군가는 그것을 아주 다르게 기억한다. 믿고 있는 대로 혹은 믿고 싶은 대로 기억은 직조된다. 그래서 기억엔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구멍들로 가득하다. 어찌 된 일인지 유독 '엄마'의 옛날이야기 속엔 그런 구멍이 많다. '엄마'의 기억과 이야기는 거듭될수록 모양을 달리한다. 반복 속에서 기억은 매번 새롭게 재구성된다. 매일의 온도와 습도가 달라지듯 '엄마'의 이야기도 날씨처럼 그때그때 분위기에 따라 변한다. 『대불호텔의 유령』은 그런 '엄마'의 기억에 대한 이야기이자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대불호텔의 유령』은 액자식 구성을 취한다. 화자는 작가로, 자신의 어릴 적 이야기가 모티브가 되는 「니꼴라 유치원」이란 단편을 구상 중인데 잘 풀리지가 않아 애를 먹는다. 그러다 우연히 엄마('용소')의 중학교 시절 절친인 '보애' 이모를 만나고 그녀의 아들인 '진'과 가까워지면서 진의 외할머니, 그러니까 보애 이모의 엄마 '박지운'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화자는 대부분의 작가들이 그렇듯 자기 이야기를 하기보다 남 이야기 듣기를 더 좋아한다. 써지지 않는 「니꼴라 유치원」은 공백인 채로 엄마 친구의 엄마가 해 준 이야기인 "대불호텔의 유령"에 매달린다. 『대불호텔의 유령』은 화자가 그 이야기로부터 빠져나와 「니꼴라 유치원」을 완성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러나 독자인 우리는 화자가 쓰려고 했고 쓰지 못하다가 많은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쓰고야만 소설 속 단편 "니꼴라 유치원"이 어떤 이야기인지 영원히 알 수 없다.


박지운의 이야기는 이제 막 전쟁의 기운이 가신 1950년대 인천의 중화루란 청나라 요릿집을 배경으로 한다. '고영주'와 '지영현'이란 의지할 곳 없는 젊은 두 여자와 '뢰이한'이란 청인(淸人) 사내가 등장하는데, 뢰이한은 박지운의 죽은 남편이자 보애 이모의 친부이며 진의 외할아버지다. 하지만 이야기 속에서 뢰이한과 박지운은 그다지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다. 그들은 엑스트라처럼 잠깐 나왔다가 스쳐 지나갈 뿐이다. 대신 고영주와 지영현이 쇠퇴해 가는 중화루를 대불호텔로 바꿔 근근이 명맥을 이어가던 중 일어난 어떤 사건이 중심을 이룬다. 하지만 박지운이 하는 이 이야기는 그녀가 직접 보고 기억하는 사건이 아니다. 죽은 남편 뢰이한을 통해 전해 들은 이야기로 박지운 역시 '~카더라'를 되풀이할 뿐인 셈이다. 그러나 박지운은 마치 몸소 경험한 것처럼 이야기한다. 또한 이 반복되는 이야기는 뢰이한이 죽은 뒤부터, 그러니까 중화루나 대불호텔을 기억하는 사람이 박지운 곁에 사라질 즈음 시작됐다.


들을 때마다 바뀌는 이야기. 주저 없이 말하는 기억들은 어딘가 기묘한 구석이 있어 미심쩍다. 이야기는 사방으로 튀고 시공간은 잔뜩 뒤섞인다. 하지만 듣는 순간엔 모든 것이 왜인지 모르겠지만 순조롭다. 그래서 빠져든다. 그 이야기가 진행되는 동안은 어떤 체면에 걸리기 때문이다. 발화하는 동안 그것은 의심이나 왜곡과 무관하게 말하는 자만의 인상적이고 또 독보적인 하나의 사건이다. '사실' 자체와 상관없이 진행되는 순간 동안 그 이야기는 '진실'이다. 이 이야기를 통해 '엄마'의 삶은 특이성을 확보한다. 다른 사람에겐 없는, 오직 '엄마'에게만 주어진 어떤 독자성 같은 것 말이다. 그를 통해 '엄마'는 여자에게만 주어지는 "귀신 들러붙은 것 같은" '사나운 팔자'를 고치고 '일반'과 '정상'의 범주에 들어가기 위해 과거를 재구성한다. 


"대불호텔의 유령" 속에 박지운은 있지만 동시에 없다. 거기엔 실제 박지운의 모습은 생략돼 있다. 그 자리를 고영주와 지영현이 대신한다. 이들은 입을 빌어 박지운은 뢰이한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이중삼중으로 윤색해 자신의 기억으로 삼고 재차 신비화한다. 자신이 보고 싶지 않은 부분은 무의식적으로 삭제하고 외면한다. 그래서 그녀의 이야기엔 구멍이 숭숭 나 있다. 그렇다면 왜 박지운은 그렇게 했나? 어째서 그녀의 이야기엔 그렇게 많은 구멍이 나 있나? 이 구멍이 지시하는 바는 뭔가? 왜 남편이 죽은 뒤에 그의 기억을 자기 것으로 삼았나? 유령 같은 이 이야기들은 어째서 '엄마'의 입으로만 발화되는 걸까?


박지운의 이야기처럼 '엄마'의 이야기 속엔 항상 다른 여자들이 등장한다. 핍박받고 소외된, 약하지만 독한 여자들. 사회에서 언제나 주변부에 머물렀던 이들이 '엄마'의 이야기 속에선 주인공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곧 '엄마'이기 때문이다. '엄마'는 자기 얘기를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가 없다. 그건 여자로서 낯 뜨겁고 염치없는 일인 탓이다. 특히나 입에 올리기 부끄러운 일이라면 더욱. 박지운은 뢰이한이 일찍 죽은 뒤 아마도 이런 말을 자주 들었을 것 같다. "남편 잡아먹은 년" 혹은 "팔자 센 년". 그러니 귀신 들러붙은 것 같은 고영주나 감쪽같이 지영현의 신분을 가로챈 '종숙'이나, 사실 모두가 박지운인 셈이다. 뢰이한을 만난 공간에 얽힌, 그로부터 들은 대불호텔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박지운은 남편과의 관계 그리고 자기 삶의 여정을 재직조한다. 


그러니까 이미 구멍은 거기에 있었고 계속 있다. 입은 벌어질 때마다 구멍이 된다. 그 빈 공간에서 소리가 만들어지고 숨이 드나들면서 이야기는 생성된다. 사회가 찍은 낙인 속에서도 애 딸린 과부가 어떻게든 자식을 키우고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자신만의 이야기 덕분일지도 모른다. 입이라는 구멍이 다른 누군가의 이름을 빌려 끊임없이 다시 짜고 엮는 이야기들, 주변으로 밀려나 억압받던 사람들을 호명하고 불러내는 이야기들 말이다. 이 이야기들 속에서 그들은 언제나 살아 있다. 박지운이 죽지 않고 "대불호텔의 유령"을 이야기하는 한 뢰이한과 고영주와 지영현은 기억된다. 그러므로 박지운이 말하는 이야기의 신빙성이나 일관성을 따지는 건 무의미하다. 이 이야기들은 어떤 "사실"을 기억하기 위함이 아니다. "기억" 자체, 즉 뢰이한, 박지운, 고영주, 지영현의 존재했음을 되새기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나는 상상했다. 박지운. 남편이 떠난 후 억척스럽고 독하게 변해버린 그녀. 그 상상을 통해 나는 문득 이해했다. 그녀는 뢰이한을 너무나도 깊이 사랑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없이도 살아가기 위해서, 그를 사랑하지 않는 가짜 마음을 만든 것이다. 그러니 그녀가 품은 건 원한이 아니다. 그건 영원한 사랑이다. 어떤 방식으로든 계속 기억할 수밖에 없는 사랑. 이야기 속에서 뢰이한은 계속 살아 있다. 그녀는 셜리 잭슨이고, 고연주이고, 지영현이고, 차오이고, 끊임없이 그들의 이야기를 엿보는 중화루의 말 많은 직원이며, 대불호텔이다. 그녀는 박지운이다.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 떠날 수 없는 사람들. (296~297쪽, 강조 인용자)



한편 박지운의 외손자인 진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외할머니 박지운을 미워하고 자신의 엄마를 동정한다.



"엄마는 평생 외할머니가 외할아버지를 욕하는 소리를 들으면서 살았어. 이런 이야기를 자주 했대. 네 아버지 때문에 내 급이 떨어졌다. 그리고 이런 소리도 종종 하셨지. 너 아니었으면 네 아버지가 그렇게 일을 많이 하지는 않았을 거다. 끔찍해? 그럼 이건 어때. 새아버지가 네 인생을 살린 거야. 네 팔자를 고쳐준 거야. 상상할 수 없지. 그런 이야기를 평생 들으면서 산다는 거 말이야. 그런데 그게 언제부터 시작된 건지 알아? 바로 뢰이한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부터야. 외할머니가 혼자된 후부터 그렇게 된 거야. 그전까지 외할머니는 엄마에게 혹독하게 군 적이 없었어. 외할머니는 외할아버지를 잃고 나서 그렇게 괴팍하고 못된 인간이 되어버렸어. 매일 이상한 이야기를 지껄이고, 딸에게 독한 소리를 하고, 이기적이고 제멋대로 구는 사람이 되어버렸지. 나도 알아.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사랑하셨다는 거. 그걸 어떻게 모르겠어. 우리 가족 이야기잖아. 평생 외할머니를 봐왔고, 엄마를 봐왔어. 그 둘을 봐왔기 때문에 알아. 하지만 외할머니는 엄마를 사랑하지는 않았어. 내게는 그 사실이 더 중요해.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남자가 아내와 딸을 남겨놓고 떠나버리는 바람에, 내 엄마가 평생 상처 속에서 살았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고. 이해가 돼? 그런 엄마가 있다는 게? 엄마가 그럴 수 있다는 게 말이야." (288~289쪽, 강조 인용자)



'남자' 혹은 '아들'의 세계에선 저런 말, 곧 "네 아버지 때문에 내 급이 떨어졌다"거나 "새아버지가 네 인생을 살린 거야"라는 말을 듣는 것이 상상할 수 없는 일인 모양이다. 게다가 엄마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 또한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나 보다. 그러나 '여자'의 세계는 저런 말과 평가들로 구성된다. 여자는 당연히 '엄마'가 되어야 하고, '엄마'는 당연히 자식을 사랑해서 자식에게 이기적이거나 못되게 굴면 안 된다. '엄마'의 역할은 '아내'의 역할보다 중요하기 때문에 자식보다 남편을 더 사랑할 경우 온갖 욕과 질타를 견뎌야 한다. 박지운은 그저 아이보다 남편을 더 사랑했을 뿐이다. 진했던 사랑만큼 밀려온 상실은 기억을 조작하고 거짓을 만들어냈다. 상실을 감당하기 위해서 때론 어쩔 수 없이 거짓이 동원된다. 박지운은 딸인 보애를 볼 때마다 떠오를 그를 아프지 않고도 가슴에 둘 어떤 방식으로 조작과 거짓을 택했을 따름이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문득, 엄마와 외할머니가 떠올랐다. 어린 시절, 나는 엄마가 외할머니를 미워한다는 사실이 무서웠다. 왜냐하면 나도 엄마가 미운 순간들이 있었으니까. 엄마에게 그런 미운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엄마가 미울 때마다 가책했다. 어떻게 내가 감히 엄마를, 사랑하는 엄마를 미워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엄마는 외할머니를 아무렇지 않게 미워했다. 무서웠다. 하지만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래도 되는 것이다. 엄마를 미워할 수도 있는 것이다. 증오할 수도 있는 것이다. 원망할 수도 있는 것이다. 얼마든지 그래도 되는 것이다. 그런 사람도 있는 것이다. 모두가 엄마를 사랑할 수는 없고, 모두가 자식을 사랑할 수도 없다.

나는 그에게 대답했다.

"응. 이해가 돼."

그가 놀랍다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말을 이었다.

"그건 뭐랄까,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을 고향이라고 믿고 사는 것과 비슷한 거겠지."(289~290쪽, 강조 인용자)



진과 달리 화자는 박지운을 이해한다. 비록 나중에 알게 된 것이지만, 화자는 엄마라고 해서 모두가 자식을 사랑할 수 없고 자식이라고 해서 당연히 엄마를 사랑하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화자는 '엄마'를 증오할 수도, 원망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리고 이것은 경험에서 비롯한다. '엄마'는 신도 아니고 성녀도 아니다. '엄마'도 그냥 사람이다. 가족일 때 우리는 이 사실을 종종 잊어버리고 그가 하는 역할이 그의 전부인 줄 착각한다. 


누구나 자기 얘기보다는 남 얘기를 더 쉽게 한다. 소설 속 주인공인 화자 또한 그래서 자꾸만 자기 이야기가 아니라 남의 이야기에 주목하는 것일 테다. 「니꼴라 유치원」을 쓰지 못한 것은 그게 자기 얘기여서이지 않았을까. 자신의 어린 시절과 엄마에 대해 말하는 것은 어렵다. 특히 이해할 수 없거나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가족일 경우에는 더더욱. 그리고 우리는 누구나 불가해한 누군가를 가족으로 두고 있다. 자신의 이야기를 밖으로 꺼내긴 힘들지만, 그와 비슷한 다른 누군가를 만나면 금방 안다. 화자가 박지운에게 관심을 보였던 이유는 그녀가 자신의 외할머니와 "놀라울 정도로"(27쪽) 똑 닮았기 때문이다. 용소가 보애와 가까워진 이유도 동일하다. 비슷한 엄마를 둔 딸의 심정을 아주 잘 알기에 친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사실상 화자는 박지운을 통해 비로소 자신과 엄마, 그리고 외할머니를 본다. 다른 여자의 입을 통해 자신의 가족 특히 '엄마'라는 계보를 마주하게 된다.


만약 자기 외할머니라면 그렇게 가만히 듣고 있거나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진이 진저리 치듯이 가족이라면 계속해서 반복되는 이야기를 주야장천 듣고 있기 힘들다. 거리감이 생기지 않는 탓이다. 분노와 애정이 뒤섞여 있기에 그 이야기들에 귀 기울이기 어려운 한계가 금방 찾아온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엄마일 땐 상황이 달라진다. 거리 두기가 가능해진다. 이렇게 틈이 벌어졌을 때에야 비로소 나의 엄마로 회귀할 수 있다. 화자가 박지운의 이야기를 통해 돌아가는 곳이 결국 자기 자신인 것처럼 말이다. 


문제는 해소되지 않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삶은 이어진다. 독자가 "니꼴라 유치원"을 결코 읽을 수 없는 것처럼 구멍은 여전히 제자리지만, 결국 그것과 같이 사는 법을 깨우치게 된다. 화자가 진에게 고백을 하고 사랑에 대한 기대를 품고 자신의 마음을 열었듯이 말이다. 박지운은 이제 곧 알츠하이머 때문에 기억을 잃고 죽을 것이지만, 화자의 이야기는 새롭게 시작된다. "니꼴라 유치원"은 이제 곧 시작될, 도래할 이야기다. 거기에서도 환대받지 못한 영혼들은 유령처럼 계속 떠돌 것이다. 때로는 위안이 되고 때로는 도피처가 되는 이야기의 모습들로 배회할 것이다. '엄마'의 이야기는 결코 마르지 않고 그것이 결국은 나의 이야기로 이어질 테니까.

매거진의 이전글 '내'가 '나'를 먹을 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