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러드차일드』(Bloodchild) ①
옥타비아 버틀러(이수현 역, 2020), 『블러드차일드』, 김영사
사랑은 이해를 전제로 해야 가능할까? 어쩌면 이해할 수 없기에 우리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지도 모르겠다. 타자는 이해 불가능한 대상이다. '나'의 자리에서 '너'를 본다는 것은 '네' 안에 있는 '나'를 보는 일에 다름 아니다. 그러니 '너'를 이해한다고 섣불리 혹은 무심결에 말하는 것은 결국 기만 내지 자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나'는 '너'를 이해한다는 이 불가능한 일을 어떻게든 하고 싶다. 애초에 모순적인 상황이므로 논리나 이성은 여기에 개입할 여지가 없다. 게다가 이것은 오로지 '너'에 대한 '나'의 욕망이기에 '너'와 '나'의 관계는 불평등하다. 하지만 '나'는 '너'를 욕망하고 '너'는 '내'가 필요하다. 불공평한 계약은 이렇게 완성된다. 온전히 받아들이고 사랑한다는 건, 결국 사리에 맞지 않는 계약 조건에 순순히 응하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생각보다 사랑이 그렇게 위대한 건 아닐 수도.
옥타비아 버틀러의 일곱 편의 단편들―「블러드차일드」(Bloodchild), 「저녁과 아침과 밤」(The Evening and the Morning and the Night), 「가까운 친척」(Near of Kin), 「말과 소리」(Speech Sounds), 「넘어감」(Crossover), 「특사」(Amnesty), 「마사의 책」(The Book of Martha)―을 모은 『블러드차일드』는 욕망과 필요에 의해 맺어진 불합리한 계약을 통해 사랑을 이야기한다. 버틀러의 단편 속 애정 관계는 그다지 낭만적이지도 않고 다정하지도 않다. 오히려 폭력에 가깝다. 인물들 사이의 접촉은 폭력에 상응하는 방식으로 기능한다. 이 불편한 터치는 결과적으로 전혀 화해할 것 같지 않은 인물들(심지어 외계인까지)을 단단하게 연결시킨다. 필연적으로 상처를 남기는 접촉 속에서 자기 자신조차 타자로 인식하는 인물들은 홧홧한 고통과 더불어 온기를 느낀다. 이 온기가 결국은 소통이 불가능해 보이던 관계를 사랑으로 엮는다. 그래서 시종 초연하고 건조한 듯한 메마른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버틀러의 이야기는 따뜻한 사랑 이야기로 읽힌다.
『블러드차일드』 속 인물들에게는 이미 정해진 가혹한 운명이 주어져 있다. 틀릭이라는 외계 생명체에게 반드시 가족 내 사내아이를 주어야 한다거나(「블러드차일드」), 자신 혹은 타인의 몸을 심각한 장애 혹은 죽음에 이를 정도로 훼손하는 유전병의 발현을 두려워하며 살아야 한다거나(「저녁과 아침과 밤」), 삼촌이 아버지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거나(「가까운 친척」), 지구적 전염병으로 인해 말하거나 쓰고 읽는 언어 능력 일체를 잃어버리고 한낱 동물로 전락한 인간 군상 속에서 살아야 하거나(「말과 소리」), 외계 생명체에게 지구를 침략 당해 이들과 계약을 맺고 타협함으로써 생존해야 하거나(「특사」) 등등. 이미 주어진 조건을 수용하지 않으면 생존 불가능한 숙명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버틀러의 인물들은 모두 비극 속 주인공에 버금간다. 그런데 좀 결이 다르다. 무릇 비극의 주인공이라면 위대해야 하는데, 이들은 그렇지가 않다. 하나 같이 치명적인 결핍을 지니고 있으며 사회적인 낙인이 찍힌 소외된 약자들이다. 가진 것이라곤 더운 피가 흐르는 몸뚱이뿐이다. 거래할 수 있는 것이 이 육체뿐이라 이것을 걸고 이들은 불공평한 계약에 기꺼이 서명한다. 소포클레스의 비극 속 주인공들처럼 거창하지는 않지만 더 초연하고 견고한 방식으로 말이다. 불가해한 타자가 살집을 벌리고 상처를 낼 것을 분명히 알고 있지만, 그래서 해피 엔딩이 되지는 않을 것임이 명백하지만, '나'는 '너'를 끌어안는다. 그리하여 이들은 끈질기게 생존하고자 한다. 더운 피가 흐르는 몸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이 몸이 있어야 '너'와 '내'가 사랑할 수 있다는 듯이.
그러니 사랑은 이해와 별개인 것 같다. 본래 사랑은 부조리해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타자와 진정한 화해란 영원히 불가능하고 끌어안은 '너'는 그저 언캐니하기만 하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반복할 수밖에 없다. 마치 또 바위가 굴러 떨어질 걸 알면서도 그것을 밀어 올리는 시지프처럼. 이미 알고 있는 결론 앞에서 한낱 인간이 할 수 있는 선택은 사실 없는지도 모른다. 존재하지 않는 선택지를 찾아 헤맬 것이 아니라 다만 지금을 버티는 게 어쩌면 더 위대한 것은 아닐는지. 사랑이 다시 위대해지는 것도 이 지점에서야 비로소 가능해질 것이다. 그러려면 온기 있는 몸이 있어야 한다. 죽지 말고 살아야 한다. 사랑은 살아남은 자의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