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러드차일드』(Bloodchild) ②
옥타비아 버틀러(이수현 역, 2020), 『블러드차일드』, 김영사
옥타비아 버틀러의 단편들은 언캐니하다. 그가 창조해낸 SF적 세계는 외계라는 측면에서 낯설고 결국은 인간에 대한 이야기라는 측면에서 친숙하다. 모순적인 것은 읽으면 읽을수록 전자에 대한 느낌이 후자와 뒤바뀐다는 점이다. 즉 그가 그려낸 외계라는 세상이 오히려 친밀해지고 인간의 면면들이 훨씬 낯설게 다가온다.
동일성을 찾아볼 수 없는 타자와 마주할 때 인간은 잔인해진다. 이 폭력성이 예상외로 익숙하게 느껴져서 당황스럽고, 이해관계 속에서 아주 건조한 방식으로 소통하려는 타자의 모습에 묘한 감동이 느껴져서 혼란스럽다. 버틀러의 소설은 온통 따뜻하지 않은 방식으로 온기가 넘쳐난다. 건조하고 미숙하고 고독한데 사랑이 그득하다. 이해(利害) 관계 속에서도 이해(理解)와 소통은 가능하고, 인간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도리어 인간적인 사랑이 탄생한다. 그리하여 끝내 묻게 만든다. 인간다움이란 뭘까? 인간이란 무엇일까? 동물, 바이러스 등 다른 생명체와 다른 게 뭘까? 있긴 할까? 다르다면 어떤 부분이 인간을 다른 생명체들로부터 구분 짓게 하나?
총 7편의 단편이 수록된 이 책은 SF적인 것 네 편과 그렇지 않은 것 세 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은 것은 「블러드차일드」와 「저녁과 아침과 밤」 두 편이다. 이 두 편은 SF적인 양상이 사뭇 다르다. 「블러드차일드」는 세계 자체가 외계라는 허구에 기반한 한편, 「저녁과 아침과 밤」은 배경은 지구인데 등장인물이 가진 유전병이 작가의 상상적 산물이다. 여기서는 이 희귀병을 가진 사람들에게 인간 사회가 대처하는 방식을 그린다. 그러나 외부든 내부든 결국은 타자와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라는 측면에서는 동일하다.
「블러드차일드」의 설정은 지구 멸망 이후 우연히 살아남아 다른 행성에 착륙하게 된 인류가 그 행성의 원주민(?) 생물 '틀릭'에게 식민지배를 받는 상황이다. 인류 정착지가 정해지고 그 속에서 서로 다른 두 생명체가 공존하기 위한 방법을 찾는데 그게 좀 기괴하다. 틀릭은 새끼를 낳기 위해 숙주인 '엔틀릭'이 필요하다. 인간 가족 중 한 명을 엔틀릭으로 삼는 대가로 틀릭은 그 인간 가족의 생존을 보장한다. 틀릭은 숙주로 여성보다 남성을 선호하는데, 이는 알을 꺼내는 과정이 위험하기 때문이다. 여성은 지속적인 인간 번식에 필수적이라 그런 위험을 감수하기에 적합하지 않다.
소설 속에서 틀릭은 "여성"으로 간주된다. "여성" 틀릭은 남성 엔틀릭 인간과 가족끼리의 결합을 함으로써 평화를 위한 이해관계를 구축한다. 틀릭은 인간에게 그곳에서 살 수 있도록 돕고 인간은 틀릭의 번식을 돕는 것이다. 이런 이상한 이해관계 속에서 주인공 '간'(인간)은 '트가토이'(틀릭)를 자신의 것으로 두고 싶어 한다. 가족 중 누군가는 트가토이의 엔틀릭이 되어야 하는데, 출산의 위험성 곧 알을 꺼내는 과정의 고통을 알고 나서도 간은 트가토이를 자신이 독점하기 위해 기꺼이 그의 엔틀릭이 되기를 선택한다.
여기서 사랑은 무조건이 아니다. 조건이 따르고 서로의 번창과 생존이 걸려 있다. 일종의 거래인 셈이다. 그 속에서 거래 이상의 의미를 찾는 것. 서로가 서로여야만 하는, 선택한 관계여야 하는 것. 이 지점 때문에 버틀러의 소설은 따뜻하다. 줄곧 인간이 온혈 동물이라는 점이 강조되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틀릭의 몸이 부드러운 벨벳 같은 촉감을 지닌 생명체라는 것도.
소설 속에서 인물들의 의사소통은 자꾸만 어긋난다. 말하지 않거나 말하더라도 오해를 수반해 버린다. 이 무수한 언어의 빈틈을 메꾸는 것은 다른 말이 아니라 접촉이다. 서로 껴안음으로써 전달되는 촉감과 온도가 그 오해를 풀고 미처 전해지지 않은 마음을 전달한다. 접촉은 위험하다. 상처를 낼 수도 있고 그래서 치명적인 아픔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연결됨을 선사한다. 혼자가 아니라는 감각. 신체 감각으로 닿는 연결됨의 느낌은 상처마저도 아물게 하는 힘이 있다.
「블러드차일드」는 그러한 접촉이 아주 이질적인 타자와도 가능함을 시사하기에 희망적이다. 공존이, 평화가 가능하려면 희생이 따른다. 평화는 아무런 대가 없이 아름다운 방식으로만 오지 않는다. 희생과 위험을 무릅쓸 때 공존은 가능하며, 이 모순적이고 위태로운 상황에서도 사랑은 싹튼다. 그것이 버틀러만의 따뜻함이 아닐는지. 치열한 사유의 공방 속에서 탄생한 사랑은 인간적이고도 아주 비인간적이다. 우리 모두는 이미 타자 앞에서 그렇게 행동했을지도 모르겠다.
한편 「저녁과 아침과 밤」은 다른 방식의 접촉에 대해 이야기한다. '듀리에-고드 질환'(DGD)은 접촉의 치명성을 드러내는 병이다. 인간의 욕망의 산물이기도 한 이 질환은 유전병으로, '헤던코'라는 마법의 탄환을 복용한 이들의 자손에게 나타났다. 온갖 암을 치료하고 심각한 바이러스의 치료제였던 이 약이 DGD의 원인이다. 헤던코로 치료를 맡은 뒤 임신을 할 경우 그 자식은 반드시 DGD를 갖고 태어났다. 그리고 대대손손 유전된다. 주인공이자 화자인 '린'은 부모가 모두 DGD 환자였다.
DGD 환자의 가장 큰 특징은 자기 신체 훼손이다. 이 반응이 일어나는 것을 '표류'라고 지칭하고, 표류하면 대체로 자살에 이르거나 살인을 한다. 그래서 DGD 환자의 평균 수명은 길지 않다. 이들은 발병하면 자신의 몸을 빠져나가야 하는 갇힌 무엇으로 인지한다. 그래서 온 신체를 뜯고 찢는다. 내가 나를 접촉할 때 가장 위험하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이뤄지는 것이다. 게다가 유전적으로 이어진다. 언제 발병하게 될지도 모르고 멈출 방법도 없다. 모든 DGD 환자들이 결혼하지 않거나 결혼하더라도 아이를 갖지 않고 죽으면 없어질 것이나, 어느 한 명이라도 사랑에 빠져 임신을 하면 사라지지 않는다. 누군가와의 접촉이 허락되지 않는 몸. 그럼에도 소설 속 린은 자신과 같이 이중 DGD 환자인 '앨런'과 결혼하고 싶어 한다. 그리고 소설은 린에게 뜻밖의 해결책을 준다. 상황을 그대로 끌어안고 책임질 방법이 있다. 접촉하지 않는 방식으로 접촉하면서 다른 방식의 연결됨이 만들어진다.
「블러드차일드」에서는 틀릭이 외부적 타자로 등장한다면(틀릭의 입장에서는 인간이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겠지만), 「저녁과 아침과 밤」에서는 DGD 환자가 일종의 내부적 타자로 그려진다. 같은 인간의 모양새를 하고 있지만 사회는 그들에게 엔블럼을 붙이고 소외시킨다. 발병 전에는 차별당하고 혐오를 받으며 살고, 발병 후에는 시설로 격리되어 동물보다 못한 대우를 받다가 비참하게 죽는다. 마치 틀릭이 그들 세계로 들어온 인간을 대형 온혈 동물 정도로 취급했듯이.
그렇다면 표류하는 DGD 환자는 인간인가, 아닌가? 제정신이 아닌 인간이라는 타자를 우리는 어떻게 수용하고 책임질 것인가? 버틀러는 이중 DGD 환자이자 여성인 린에게 그들 모두를 관리할 임무를 주었다. 그리고 린은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표류하는 환자들을 유일하게 인간의 모습으로 돌리는 역할, 그 역할을 위해 자신의 온 삶을 던져야 하는 일 말이다. 그래서 겸허해진다. 숙명 앞에서 고개 숙이는 인간의 뒷모습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이기에. 여전히 물음은 남는다. 우리, 그러니까 인간이란 무엇인지. 유전자 하나에 모든 것을 저당 잡히는 것이 인간일 따름이라면 말이다.
버틀러의 소설은 타자를 극한으로 몰고 간다. 그리고 이러한 타자의 존재 앞에서 나는 한없이 쪼그라들었다. 과연 나는 그들과 그렇게 다를까? 이 의심 속에서 자유롭기 어려웠다. 이질감과 거북함이 언캐니함 속에서 반복되는 경험. 버틀러의 마술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