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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타 Mar 20. 2022

'한쪽'에게만 '멋진' 세계

『멋진 신세계』(Brave new world)

올더스 헉슬리(안정효 역, 2015), 『멋진 신세계』, 소담출판사



늙지도 않고 아프지도 않고 그래서 고통이 없는 세상은 행복할까? 분노, 질투, 우울, 슬픔 같은 감정은 알약 하나로 간단히 소거되고, 언제든 꿈이라는 환상 속으로 손쉽게 도피할 수 있는 삶이 있다면? 누구든 누군가와 잠자리를 할 수 있고 따라서 연인이나 가족 같은 특별한 결속이 존재하지 않는 관계는 평화로울까? 만약 가족이라는 구조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죽음이 상실이 아니라 스위치의 꺼짐과 다를 바 없다면? 모든 것이 소독되고 표백되어 깨끗하고 말끔하며 반짝이는 세상은 아름다울까? 더럽거나 무섭거나 아프거나 이상하거나 괴로운 등 모든 부정적인 것들을 싹 치워버린, 이 새로운 세상은 과연 얼마나 멋질 것인가. 『멋진 신세계』는 이 사고 실험을 1932년 일찌감치 단행한 헉슬리의 결과물이다.


SF의 고전이라 일컬어지는 『멋진 신세계』는 시종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을 주었다. 이런저런 SF 영화에서 봤던 디스토피아의 단초가 모여 있는 듯했다. 게다가 헉슬리가 상상한, 과학기술을 통해 거부하고 외면하고 싶은 인간의 모습을 모두 소거한 사회는 지금 우리에겐 그다지 새롭지 않다. 21세기가 헉슬리가 예견한 미래를 부지런히 현실로 만들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여전히 문명은 질서와 안정, 청결과 안락의 가면 속에 괴물을 감추어둘 뿐이다. 지구는 계속 뜨거워지고 바이러스와 전염병으로 세계 곳곳은 무법천지가 되고 있다. 요동치는 지구 위에서 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비참하게 죽어나간다. 그러므로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안타깝게도 9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전쟁으로 인류 소멸이 목전에 닥치자 인류는 다 같이 생존을 위해 합심한다. 과학의 발전은 당연하다는 듯이 계급과 차별 위에 군림한다. 유전학은 더 이상 예측 불가능한 방식의 생식을 허락하지 않는다. 알파, 베타, 감마, 델타, 엡실론으로 구성된 난공불락의 사회 시스템은 아기 공장을 통해 굳건히 유지된다. 아기들은 자궁이 아니라 유리병에서 자라고, 따라서 어머니도, 아버지도 존재하지 않는다. 가족에 대한 언급은 외설적이거나 수치스럽거나 역겨운 것으로 취급된다. 하나의 인간은 하나의 세계를 위한 부속품에 불과하다. 


전체를 위한 부분으로 전락한 인간은 끊임없는 쇼핑을 통해 이 시스템을 내부적으로 지탱한다. 피라미드 형의 시스템은 소비 촉진으로부터 안정성을 획득한다. 그래서 장비가 많이 필요하고 돈이 많이 드는 스포츠만 허락되고 오직 새것만이 바람직한 것으로 인정된다. 모두가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일을 똑같이 하고 정해진 여가를 다 같이 한다. 여가에는 당연히 섹스도 포함된다. 성은 억압되지 않는다. 여기서 섹스는 스포츠와 다를 바 없는 하나의 유희다. 모두가 숨길 것 없이 자유롭게 파트너를 바꿔 가며 잠자리를 가진다. 그래서 섹스 자체를 거부하거나 한 명의 파트너만을 고집하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이를 통해 공동체는 개체성을 소멸시키고 인간마저, 특히 여성을 하나의 소비재로 치환한다. 남자들은 거리낌 없이 여자의 몸을 평가하고 여자는 남자들로부터 자신의 몸이 좋은 평가를 받길 원한다. 그리하여 모두가 행복하고 향기로운 신세계는 소비라는 연료를 바탕으로 빈틈없이 돌아간다. 


이 "완벽한" 세계를 외부에서 지지해 주는 것이 곧 야만인 거주 구역이다. 구태여 개척하지 않고 남겨둔 이 구역은 저 세계에 문명이라는 정체성을 부여하는 외적 타자로 기능한다. 철저히 분리된 야만 사회를 통해 문명은 문명이라 호명될 정당성을 획득한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저 "완벽한" 세계에 균열을 내는 인물 "존"이 등장한다. 


존은 린다의 아들이다. 델타인 린다는 파트너 토마스와 함께 관광차 야만인 거주 구역에 왔다가 사고로 낙오하여 문명사회로 돌아가지 못했다. 임신이 금지된 사회에서 온 린다가 파트너와의 사고로 임신을 하고, 또 사고로 야만인 거주 구역에 남겨진 채 출산해버리고만 결과가 곧 존이다. 존은 문명이 저지른 과실의 필연적 부산물인 셈이다. 그래서 존은 야만 사회 속에서도 이방인으로 취급되어 고립된다. 문명사회의 습관을 버리지 못한 린다는 야만 사회에서 창녀로 낙인찍힌 채 하루하루를 술에 절어 산다. 존은 이렇듯 방종한 어머니에 대한 증오와 얼굴 모르는 아버지에 대한 갈망 속에서 우연히 발견한 셰익스피어의 전집을 읽고 또 읽으며 자란다. 야만인 구역에 관광 온 또 다른 커플인 버나드 마르크스와 레니나 크라운이 이 둘을 발견하면서 존과 린다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결과적으로 존은 문명사회에 아무런 균열도 가게 하지 못했다. 존은 문명인들에게 한낱 구경거리 내지 새로운 상품에 불과했다. 그가 일으킨 크고 작은 사건들은 사소한 소동이나 재밌는 쇼, 외설적인 농담 정도로 치부됐다. 존의 절규는 이들을 배꼽 잡고 웃게 했을 뿐이고, 그의 고뇌와 갈등은 사람들을 약간 어리둥절하게 했을 따름이다. 그러니 끝내 파국에 이른 존의 비극적이고도 희극적인 말로는 애초에 예견되어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을 소비할 수 있는 사물로 바꿔 버리는 사회가 불행할 권리를 부르짖는 사내를 가만히 둘 리 없을 테니. 


게다가 존은 자신만의 언어도 가지지 못했다. 대화 중 그가 하는 말의 대부분은 셰익스피어의 희곡 대사들이다. 자유와 선, 신과 시, 위험과 죄악, 고통 등 존이 열렬히 찾은 가치들은 모두 그 자신의 말이 아니라 셰익스피어의 대사들로 발화되었다. 존 역시 문명인들 못지않게 무언가에 씐 채 한 가지에 집착해 있을 뿐인 건 아닌지. 부재한 아버지에 대한 욕망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뒤섞여 극복하지 못한 사춘기 속에서 방황했을 뿐인 건 아닌지.


『멋진 신세계』의 마지막 문장을 읽고 나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린다가 낳은 아이가 딸이었다면 어땠을까? 혹은 세계 정부가 떠받드는 유일신인 포드가 여자였다면? 그랬다면 『멋진 신세계』 속 유토피아(디스토피아?)는 다른 방식으로 구축되어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이 안 들 수 없을 만큼 헉슬리의 신세계는 남성 중심적이다. 


남자 인물들은 다채롭고 다각적으로 묘사되는 한편 여자 인물들은 얕고 파편적으로 서술된다. 레니나조차 남자들이 섹스하고 싶어 하는 여자가 되는 것에만 몰두한다. 존의 어머니인 린다도 마찬가지다. 타락한 어머니는 창녀로 손가락질받고 추하게 늙어서 외롭게 죽는다. 남자 인물이라고 해서 풍자적으로 그려지지 않는 것은 아니나 지나치게 균형감이 없달까. 게다가 피임 역시 전적으로 여자의 몫이다. 어째서 성이 자유로운 세계 속에서도 남자는 여자의 몸을 평가하는데 여자는 그렇지 않은 것인지. 거기에서도 여자는 선택받아야 하는 수동적 위치에 머문다. 이런 측면에서 『멋진 신세계』는 (이걸 시대적 한계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의문스럽지만) 시대적 한계를 드러낸다. 헉슬리의 신세계에는 가족이라는 구조가 사라진 대신 유일신으로서의 아버지(포드)가 건재하다. 가부장제는 도태되기는커녕 멋지고(brave) 새로운(new) 모습으로 더욱 확고해졌다.


존은 구경거리로 전락해 파멸하고 멋진 신세계는 끝까지 굳건하다. 셰익스피어의 문학을 금지하고 혼자 있는 시간도 막아버리는 세계. 갈등과 좌절, 불편과 불행, 외로움이나 고통이 없는 세계. 스마트폰과 빅데이터, cctv 등 온갖 기계들로 둘러싸인 지금의 세계는 과연 이 소설과 멀리 떨어져 있는지. 우리는 헉슬리가 90여 년 전에 회의적이고 냉소적으로 그린 이 미래 세계에 이미 오래전에 당도해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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