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환한 날들」, 「초파리 돌보기」
백수린, 「아주 환한 날들」, 『릿터』 31
임솔아, 「초파리 돌보기」, 『릿터』 31
엄마와 딸의 관계는 미묘하다. 같은 '여자'지만 사실은 같지 않아서 종종 어긋난다. 특히 여자라는 이유로 많은 억압을 받아온 세대(엄마)와 그에 비해 다양한 기회와 자유를 누린 세대(딸) 사이에는 분명한 거리가 존재한다. 엄마는 아버지와 남편의 억압 속에서 나은 미래를 위해 아등바등 살았다. 덕분에 딸은 피아노 학원을 다니고 잘 정리된 자기 책상에서 책을 읽고 공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때문에 딸의 삶 속에는 엄마의 자리가 없다. 무능하거나 병약한 남편 때문에 엄마는 항상 일 하느라 바쁘고 피곤하다. 부재한 엄마의 자리는 그녀의 욕망이 대신한다. 엄마는 자신이 하지 못했던 것을 딸이 이뤄주길 바란다. 엄마는 그것을 희생이라 부르지만 딸은 부재와 무관심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이제 좀 먹고살 만해진 늙은 엄마의 곁에는 딸이 없다. 딸을 기른 것은 엄마의 손이 아니라 그녀의 욕망이었고, 딸이 보고 자란 것은 엄마의 얼굴이 아니라 등이기 때문이다.
백수린의 「아주 환한 날들」과 임솔아의 「초파리 돌보기」에서 나이 든 엄마와 어른이 된 딸의 관계를 읽었다. 두 소설에서 모두 엄마와 딸 사이는 소원하다. 전자의 엄마는 집안 생계를 책임지느라 딸의 운동회에도 한 번을 가지 못했고, 후자의 엄마는 자신의 이야기와 걱정에 몰두해 정작 딸에 대해선 잘 모른다. 교육 수준이 낮고 생계를 위해 평생 일을 해야 했던 두 엄마는, 그래서 고학력의 딸들로부터 소외된다. 「아주 환한 날들」 속 딸 '인서'는 친정 엄마에게 두 아이를 맡아 달란 부탁을 하지 않고, 「초파리 돌보기」 속 '지유'는 엄마 '원영'을 만난 지가 3년이 넘은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전화를 먼저 거는 사람은 언제나 엄마고 퉁명스러운 딸의 반응에 서운한 사람도 언제나 엄마다. 한편 딸은 딸대로 엄마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몰라서 어렵다. 엄마의 삶을 가늠할 수 없기 때문에 심리적 거리는 좁혀지지 않는다. 닮은 듯 닮지 않은 두 사람의 관계는 그래서 쉬이 봉합되지 않는다.
두 소설 속 두 엄마는 성격이 아주 다르다. 「아주 환한 날들」의 주인공은 말수가 적고 빈말을 못한다. 체면 차릴 줄 모르고 남의 눈을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지나친 솔직함 때문에 오해를 사기도 해 대체로 인간관계엔 서툴다. 억척스럽게 과일 장사를 하면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 진 그녀는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는 타입이다. 한편 「초파리 돌보기」의 원영은 나이브(naive)하다. 현실 감각이 떨어지고 매사에 걱정이 많다. 순진하기도 하고 아둔하기도 한 원영은 끊임없이 말을 한다. 원영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을 자기 좋을 대로 해석하고 받아들인 다음 남들도 자신과 같이 생각할 거라고 여긴다. 그래서 원영은, 계속 눈치는 보는데 정작 눈치는 없는, 그런 인물로 안쓰럽고 가엽다. 이렇듯 정반대라 할 만큼 두 사람은 다르지만, 딸의 입장에서 곤욕스럽긴 마찬가지다. 둘 다 말해지는 것보다 말해지지 않은 것을 더 헤아려야만 그들의 삶을 납득할 수 있다.
두 소설 속 두 엄마는 자신만의 언어를 갖지 못했다. 발화할 수 있는 토대를 상실한 두 사람은 모든 시간을 각자의 방식으로 겪고 견뎠다. 그럼에도 원영은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를 두루 섭렵했지만 "무경력 주부"로 호명될 뿐이고, 선비처럼 점잔을 빼던 남편 때문에 「아주 환한 날들」의 '그녀'는 평생을 억척스러운 장사꾼으로 살았다. 특히 「아주 환한 날들」의 주인공은 소설 속에서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다. 단지 '그녀'로만 지칭되는 주인공은 아마도 인생의 대부분을 '인서 엄마' 혹은 '과일 가게 안주인'으로 불렸을 것이다. 수많은 직업을 전전했음에도 "무경력 주부"로 수렴되어 버리는 원영처럼 말이다. 따라서 이 두 사람이 자신의 경험과 삶을 직접 말하거나 쓰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이름 없는 자가 어떻게 자기 얘기를 자연스럽게 할 수 있겠나. 「아주 환한 날들」의 주인공은 매주 수요일마다 평생교육원에서 수필 작문 강의를 듣는다. 우연히 수강하게 된 수업에 주인공은 한 편의 글도 써 가지 못한다. 쓸 말이 떠오르지 않아 하염없이 백지를 바라보는 일이 거듭된다. 「초파리 돌보기」의 원영 또한 작가인 딸이 자신의 이야기를 대신 써 주길 바란다. 매번 누군가의 입을 빌려 발화되는 원영의 이야기는 어디서 들은 듯한 레퍼토리로 반복된다. 원영은 토막토막 분절된 이야기 조각을 딸 지유가 그럴듯하게 기워서 완성해주길 기다린다.
두 사람이 지나온 시간은 말해질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하다. 문화 자체가 남성적인 공간에서 여성의 노동과 경험들은 언제나 비언어적인 것으로 치부되기 때문이다. 수필이나 소설 같은 글쓰기도 오랜 시간 동안 남성의 전유물이었다. 역사에 길이길이 남은 작가의 대부분은 주지하다시피 남성이다. 남성의 시각에서 남성의 경험과 남성의 말로 쓰인 글들이 즐비한 곳에서 여성이 자신의 삶에 대해 쓸 수 있는 여지가 얼마나 있었을까. 지금이라고 해서 크게 다를까? 그래서 딸은 엄마를 이해하기가 더욱 어렵다. 엄마는, 자신의 딸만은 그것을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자신은 하지 못했던 것―야망을 가지거나 전문직을 가지거나―을 딸이 실현할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현실은 믿음을 배반한다. 딸이 마주하는 세상 역시 엄마의 것만큼이나 만만치 않다. 하여 「아주 환한 날들」의 인서는 친정 엄마에게 뭔가를 부탁해야 할 때 자꾸만 남편을 보내는 것일 테다. 대학을 가고 직장을 잡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그렇게 살아 내는 것만으로도 인서는 숨 가쁠지 모른다. 그 와중에 말 없는 엄마의 침묵까지 읽어 내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지 않을까.
그럼에도(다행스럽게도) 「아주 환한 날들」과 「초파리 돌보기」는 각자의 방식으로 엄마의 침묵과 괄호들을 끝끝내 언어화한다. 문장 속 띄어쓰기처럼 기능해 온 두 사람은 각자의 딸을 경유해 자신만의 의미를 돌려받는다. 「아주 환한 날들」의 주인공은 딸이 임시로 맡긴 앵무새를 통해서, 「초파리 돌보기」의 영원은 완성된 딸의 소설을 통해서, 자기 자신과의 화해를 이루어 낸다. 두 엄마의 말해지지 않은 것, 말해질 수 없는 것은 딸을 매개로 재생산된다.
「아주 환한 날들」 속에는 다음과 짧은 대화가 등장한다.
그들은 같이 건물을 빠져나와 나란히 횡단보도 앞에 서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렸다. 바로 옆에서 본 강사의 얼굴은 그녀의 딸처럼, 더 이상 아주 젊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아직은 삶에 대한 불안으로 초조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선생님은 엄마랑 사이가 좋아요?"
강사는 그녀의 질문에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평범한 것 같은데요."
"좋으냐"는 물음에 좋다는 것도 아니고 좋지 않다는 것도 아닌 대답. 엄마와 딸 관계는 좋은지 안 좋은지로 나눌 수 없는 문제일 것이다. 게다가 어떤 관계가 좋은 관계인지 누가 알까. 살갑다가도 무서운 것이 엄마고, 닮은 만큼 다른 점도 많은 사람이 엄마다. 그래서 "평범한" 모녀 관계는 실상 하나도 평범하지 않다. 엄마만큼 알기 어려운 사람이 있을까. 자신이 누군가의 엄마가 되어도 "나"의 엄마는 언제나 미지의 존재다. 그러니까 항상 불만족스럽고 빗나간다. 지워지지 않는 간극을 사이에 둔 채 각자의 위치를 겨우 훔쳐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넘겨다보며 엄마의 자리를, 딸의 얼굴을 더듬거릴 때, 그리고 그런 노력을 포기하지 않을 때, 비로소 연대는 이루어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