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기와 석류」
조예은, 「고기와 석류」, 『릿터』 31
고독사를 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도 오로지 혼자 남은 사람이 자신의 고독사를 피하려면? 답은 명료하다. 누군가를 만나면 된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혹은 의도적이든 아니든. 「고기와 석류」는 누군가, 곧 자신을 먹어줄 것으로 예상되는 '존재'를 만나라고 권한다. 이 파격적인 제안은 생각보다 썩 괜찮다. "고독사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로 권고될 법하달까.
옥주는 오랜 기간 남편의 병간호를 했다. 구시내가 된 스산한 곳을 끝내 떠나지 못한 것도 병약한 남편의 고집 때문이었다. 장례식장에서 수육을 삶는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는 옥주 곁엔 이제 아무도 없다. 남편이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하나 있는 아들은 10년 전 필리핀에 사업을 한다고 떠난 뒤로 소식이 없다. 남편이 죽은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은 옥주는 답답함과 까마득함 속에서 산다. 환갑이 넘어서도 미래를 생각해야 한다는 사실이 벅찼고, 홀로 맞을 죽음에 대한 공포에 시달렸다. 그런 옥주 앞에 '그것'이 나타났다. 쓰레기통을 뒤지며 생고기를 정신없이 먹어치우던 '그것'을 만났다. 입가에 핏물을 묻힌 채 번뜩이는 붉은 눈을 보며 옥주는 석류알을 떠올렸다. 곧 '석류'라고 부를 '그것'을 옥주는 남들 몰래 혼자 남은 집 안으로 들였다.
소설 속에서 '그것'의 정체는 명확하지 않다. 그저 인육을 먹어야만 하는 인간을 닮은 생명체로 그려진다. 대체로 온순하고 천진한 '그것'은 허기에 사로잡혀 정신을 잃으면 눈동자가 붉어지는 특징을 나타낸다. 말은 하지 못하고 살갗은 창백하고 차갑다. (뱀파이어의 좀비스러운 버전이라고 해야 할까.) 어느 날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그것'을 옥주는 자신을 찾아온 것이라 느낀다. 처음 만났을 때 그것이 자신의 팔로 달려들어 살점을 뜯어먹었을 때에도, 옥주는 '그것'을 원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을 공격하고 상처를 낸 '그것'의 행위를 "굶주린 들개가 쥐를 잡아먹는 것처럼 당연한 이치"(200쪽)로 받아들인다. 상처와 함께 시작된 이들의 기묘한 동거는 섬뜩하고도 따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옥주는 손해 보는 장사를 해서 억울하다고 생각한다. 결말이 남편보다 못하다는 사실 말이다. 열심히 살았는데도 어째서 남편은 자신의 보살핌을 받고 떠났는데 자신은 홀로 남아 버렸나. 이렇듯 불공평한 세상이기에 옥주는 서슴없이 남편의 무덤을 다시 파는 선택을 한다. 굶주림으로 점점 더 여위어 가는 석류를 위해 남편의 시신을 기꺼이 고기로 본다. 석류가 게걸스럽게 먹고 남은 것은 아이스박스에 싸 가는 치밀함까지 발휘한다. 멈춰 있던 냉장고를 가동하고 옥주는 거기에 남편의 시신을 부위별로 포장해 차곡차곡 넣는다. 그리고 석류의 눈동자가 석류알처럼 물들 때마다 조금씩 꺼내 줘야겠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행위와 사고 흐름에 옥주는 망설임도, 죄책감도 없다. 세상의 불공평함은 '석류'라는 존재를 통해 기이한 균형을 찾아간다. 옥주는 받을 생각이 없던 조직 검사를 받아보기로 마음을 굳힌다. 석류가 자신을 먹기 전까지 석류를 보살피기 위해 말이다. 그렇게 옥주는 죽음을 삶의 모습으로 끌어안는다.
소설은 옥주의 입을 빌려 고독사야말로 최악의 결말이라고 말한다. 평생 열심히 살면서 누군가를 돌보고 보살피는 일만을 해온 사람에게 이런 엔딩은 너무 가혹하다고. 그래서 옥주는 반듯하게 누운 자신을 맛있게 먹어치우는 석류를 보는 것으로 끝맺고 싶어 한다. 이것이 그녀가 고독사라는 눈앞에 닥친 최악의 결말을 피할 수 있는 최선의 시나리오다. 이 이상하고도 어딘가 통쾌한 귀결이 썩 마음에 드는 이유는 왜일까.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인상 때문인 것 같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았는데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이 억울한 결말이, 「고기와 석류」에선 단순히 '끝'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여기서 옥주의 죽음은 곧 석류의 고기로, 그리고 석류의 삶으로 연결된다. 순환의 감각은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감소시키고 삶에 활력을 주는 모양이다. 옥주가 낯선 석류의 눈의 보며 펄떡펄떡 뛰는 심장의 느낌을 감지한 것은 이 때문이 아닐까.
그러므로 죽음은 어쩌면 단순히 고기를 의미하는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매일 음식으로 소비하는 고기도 옥주의 남편처럼 한때는 생명체였다. 즉 우리는 식탁 위에서 항상 죽음을 마주한 셈이다. 그럼에도 인간은 어째서 이다지도 죽음을 두려워하고, 특정 결말에 불만을 품는 걸까? 섣부르게 추측해 보자면, 아마도 육체가 단지 고기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무의식적 믿음 때문인 듯하다. 죽고 나면 몸은 말 그대로 살덩이에 불과해진다. 인간의 고매한 정신이 자신의 몸이 단순히 살덩이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신화를 만들어낸 건은 아닌지. 그리고 이 신화는 몸이 음식으로 전락하는 것에 대한 공포를 불러일으켜 수많은 장례 의식과 매장 문화를 만들어 냈을 것이다. 하여 제대로 장례를 치르지 못하거나 제때 시체가 수습되지 못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고독사가 단순히 외로움의 문제가 아니라 최악의 결말이 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라 짐작된다.
그런데 「고기와 석류」에선 인간의 육체가 고기와 다르다는 신화가 반전된다. 소설은 고기에 불과해질 거라는 두려움을 옥주를 통해 고기로 순환하리라는 기대로 치환한다. 그리하여 육체가 단지 고기가 될 때에야 비로소 인간다움이 발휘될 수 있으리라 암시한다. 낯선 생명체,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생명체를 의심과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인 옥주의 행위, 팔을 물어 뜨기고도 그 원인을 상대에게 투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음을 자각하고 인정하는 옥주의 자세는 그래서 고귀하다. 인간다움이 고귀해지는 것은 이러한 행위와 자세 덕분일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은, 고독사라는 결말은 '죽음=고기'라는 등식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대하는 인간 태도의 문제이며 결국 산 자의 차원이다. 죽은 자는 결코 죽지 않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