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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타 Apr 21. 2022

연쇄 가스라이팅

「단 한 번의 일」

정소현, 「단 한 번의 일」, 『릿터』 30



가스라이팅의 사전적 정의는 "상황 조작을 통해 타인이 자신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켜 현실감과 판단력을 잃게 함으로써 그 사람을 정신적으로 황폐화하고 그 사람에게 지배력을 행사해 결국 그 사람을 파국으로 몰아가는 것"이라 한다.* 주로 가족이나 연인처럼 아주 친밀한 관계에서 일어나고, 상대가 가진 공감 정서를 적극 이용한다. 「단 한 번의 일」은 이러한 가스라이팅의 사전적 정의를 정확히 구현한 소설이다. 한 여자가 자신의 연인과 그 엄마로부터 어떻게 가스라이팅 당하고 그리하여 고립되고 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20대 중반인 진아는 일찍 엄마를 여의고 홀로 외롭게 자랐다. 서울에 상경하여 생활비를 벌기 위해 실용음악학원의 총무로 일하던 그녀는 거기서 베이스 취미반 강사로 일하던 현우를 만났다. 현우는 대학 시절 밴드를 하면서 앨범을 한 장 낸 적이 있다. 진아는 엄마의 유품인 스크랩북과 레코드 재킷에서 본 현우를 금방 알아보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은 모두 음악인 것 같다는 진아의 말"을 현우가 사랑이라고 고쳐주면서(135쪽) 24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연인이 되었다. 그리고 진아에게 "단 한 번의 일"이 일어난다.


현우는 진아가 그를 걱정하는 마음에 건넨 한 마디에 앞뒤 설명 없이 그녀의 목을 조르고 뺨을 때리기 시작했다. 어리둥절한 상태로 진아는 현우에게 맞다가 정신을 잃었다. 다음날 깨어나 보니 현우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녀의 상처에 약을 바르고 있었다. 엄청난 공포 속에서 진아는 출근 준비를 하고 자취방을 도망치듯 나왔다. 혹시라도 그가 따라와서 자신의 머리채를 잡아채 가지는 않을까 무서워 계속 뒤를 돌아보곤 하면서. 이 "단 한 번"의 폭력으로 진아 몸 곳곳엔 상처와 멍이 생겼고, 왼팔엔 깁스를 했다. 그날 진아는 어마어마하게 쏟아지는 현우의 연락을 모조리 무시했고 그와 어떻게 헤어질 것인지를 궁리했다. 그러다 그가 교통사고로 심하게 다쳤다는 연락을 듣게 된 것이다.


현우가 의식불명이 되고 나서야 진아는 현우가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 자신이 그에 대해 얼마나 몰랐는지를 깨닫는다. 줄곧 폐쇄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현우가 진아에게 자신의 많은 부분을 숨겼기 때문이었다. 병원에서 현우의 엄마인 지숙을 만남으로써 그에게 대형 학원 체인 사업을 하는 부모와 전문직에 종사하는 형제가 있다는 사실, 진아가 일하고 있는 학원 역시 그의 소유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모든 것에 대해 진아에겐 일언반구 없이 현우는 그녀의 작은 자취방에 얹혀살면서 기생했던 것이다. 30여 년 전 현우와 같이 밴드를 했던 사람들을 만나면서 사태는 더욱 심화된다. 그러나 자신이 알고 있던 현우의 모습이 모두 거짓에 불과했음이 드러나고도 진아는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한다. 소설 막바지에 다다라서는 현우의 아내라 자칭하며 그를 변호하고 그를 위한 일을 주도하기에 이른다.


소설은 왜 진아가 이런 잘못된 결론에 이르러 이상한 선택을 하고 마는지를 현우가 아니라 그의 어머니인 지숙을 통해 드러낸다. 그리하여 현우 역시 피해자일 수 있음이 암시된다.


지숙은 병원에서 처음 진아를 만났다. 죄책감으로 자책하는 진아를 지숙은 망설임 없이 이용하기로 한다. 식물인간이 된 자신의 막내아들을 건사할 사람으로 말이다. 그녀는 이미 현우의 가스라이팅으로 제정신이 아닌 진아를 교묘히 조종하여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만든다. 가령 진아가 현우에게 당한 폭력에 대해 말하자 지숙은 아무렇지 않게 자기 아들이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선을 긋는다. 그러면서 진아에게 예민하게 굴지 말라며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로 치부한다. 그리고는 둘 사이가 평범하지 않은 "특별한 인연"이라며 진아로 하여금 현우를 떠나지 못하도록 회유한다. 지숙의 말들은 혼란스러워하는 진아의 귀를 닫게 만들어 현우에 대한 의심들을 거두어들이도록 만든다.


이러한 지숙의 언행에는 섬뜩한 구석이 있다.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 때만 해도 가정을 꾸리지 않은 것이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떻게든 살아가야 하는 상황이 되고 나니 그에게 가정이라는 울타리가 없는 게 못내 아쉬웠다"(126쪽)거나, 병원에 찾아온 현우의 친구들을 보며 "30년 만에 만난 아들 친구들은 이렇게 건강하고 제 몫을 하는 어른으로 나이를 먹었는데 왜 현우만 저 모양인 것일까"(137쪽)라고 비교할 땐, 어딘가 서늘해진다. 그러니 다른 형제들처럼 번듯한 직장도 없이 반백 년 동안 제멋대로 살며 속만 썩인 현우가 지숙은 영 마음에 차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지숙은 의식불명의 막내아들을 포기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발길이 끊길수록 지숙은 더 악착같이 현우의 곁을 지키며 병원을 오갔다. 그러면서 지숙은 그녀에게 일어난 "단 한 번의 일"을 계기로 진아와 현우의 친구들을 붙들고 의식불명인 막내아들의 위상을 복권시키는 작업에 착수한다. 현우를 살려두는 건 어쩌면 오로지 지숙 자신을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지숙에게 일어난 "단 한 번의 일"은 미동 없이 누워 있는 현우의 눈이 떴다 감기는 것을 홀로 본 것이다. 단 한 번. 이 사실을 지숙은 간병인과 진아를 포함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호들갑스럽게 알린다. 지숙에게 이것은 자신의 확신 곧 아들을 포기하지 말아야 할 근거를 입증하는 강력한 사인이기 때문이다. 또한 지숙은 이 일을 통해 오래된 기시감을 느낀다. 현우를 잉태했을 때 생겼던 강렬한 감정이 고스란히 다시 살아난 것이다. 그러니까 현우가 오로지 자신의 소유로만 존재했을 시기에 느낀 강렬한 감정이 되살아났다. 그리하여 지숙은 아들에게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 주고 싶어진다. 의식 없이 누워 있는, 그리하여 다시 완전하게 자신의 통제 하에 들어온 아들을 위해서.


이렇듯 지숙은 전형적인 가스라이터로 읽힌다. 그런 엄마와 존재감 없는 아버지 밑에서 현우가 어떻게 성장했을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그래서 현우를 마냥 미워할 수만은 없었다. 진아가 현우의 통제 속에 고립되어 판단력을 상실했듯, 현우 또한 지숙의 지배력 속에서 방향 감각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사랑과 애정은 지배 및 통제와 왜곡된 관계를 맺고, 무너진 자존감은 과장된 자기상으로 대체되지 않을까. 불합리한 관계 속에서 어쩔 수 없이 도달한 결론을 누군가 틀렸다고 말한다면? 자신은 힘겹고 복잡하고 어렵게 다다른 결론인데, 누군가 그게 사실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이는 곧 자기 자신에 대한 부정이기에, 진실을 외면하고 거짓으로 지어진 환상 속으로 도피하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방어할 것이다. 그래서 쉽게 당신이 잘못 아는 거라고 대응하거나 다른 사람을 비난하며 남 탓을 하게 된다. 진아 역시 현우를 두둔하며 결국 그의 또 다른 피해자를 설득하기에 이른다. 


이렇듯 뒤틀린 관계는 또 다른 뒤틀린 관계를 연쇄적으로 만들어내니, 지숙과 현우, 현우와 진아를 보면 그러하다. 그러니 누가 피해자이고 가해자인지도 명확하지 않다. 가해자가 피해자이고 피해자가 다시 가해자가 되는 악순환 속에선 누구든 가해자가 되고 동시에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양가성은 모든 사건에서 발견된다. 현우가 진아를 때린 단 한 번의 일이, 지숙에겐 어쩌다 한 번 일어난 대수롭지 않은 사건이지만, 진아에겐 생명의 위험을 느낀 사건이었다. 그리고 현우가 눈을 떴다 감은 단 한 번의 일이, 지숙에겐 긍정적 사인이지만, 진아에겐 불길함의 징조였다. 단 한 번의 일이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에게 좋은 것이 꼭 너에게 좋으리란 법이 없다. 가스라이팅은 이러한 자명한 사실을 간과한 지독한 범죄다. 「단 한 번의 일」은 이 사실을 예리하고 명징하게, 그리고 불편하게 일러준다.


* 김선호, "혹시 내가 '가스라이터' 부모일까?", 한겨레, 2019년 9월 3일

https://www.hani.co.kr/arti/society/schooling/908196.html#csidx9a674af7a995c4cab8d4837a5502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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