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자타 Apr 07. 2022

SF와 '여자'

『혁명하는 여자들』(Sisters of the revolution)

조안나 러스 외 14인(신해경 역, 2016), 『혁명하는 여자들』, 아작



2015년 앤 밴더미어와 제프 밴더미어가 엮은 이 선집의 원제는 Sisters of the revolution이다. 혁명과 자매들. 언뜻 이 두 가지는 썩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혁명'은 늘 남자들의 소유였고 '자매들'은 여자들의 유약하고 느슨한 동료애를 연상케 하기 때문이다. 과격한 것과 말랑한 것이 한 문장 속에 있으니 미묘하게 어긋나는 느낌이다. 어쩌면 SF와 페미니즘의 관계도 그러하지 않았을까. 


페미니즘 SF. 이 구절에서 뭔가 빗겨나가는 느낌이 드는 건 나만의 기시감인지. 오랜 세월 SF는 남성 작가들의 전유물이었다. 특히 Science를 전제로 하기에 더욱 그럴 것이다. 물론 Fiction도 마찬가지다. 창조의 세계는 늘 여자들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아마도 그래서 SF의 세계는 오랜 세월 페미니즘은 물론이거니와 여성 작가조차 쉬이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여자들은 상상하고 창조하지 않을 수 없는 필연적인 상황 속에 매 순간 놓여 있었다. 생물학적으로 주어진 성별과 사회적으로 부과된 성역할은 특정한 성별에 특정한 억압을 생성했고, 이것은 분명 과학의 범주 안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러니 여성 작가의 상상력은 자연스럽게 SF로 나아간다. 하여 페미니즘 SF는 사실 제법 당연한 귀결이다. 이 연결고리를 부자연스럽게 보이도록 만들어야만 했던 이유는 페미니즘 SF가 누군가(?)의 숨기고 싶었던 치부를 노출시키고야 말기 때문일 것이다. 『혁명하는 여자들』은 그 치부가 뭔지를 구체적이고 재치 있으면서 풍자적인 방식으로 까발리는 15편의 단편 소설들을 모아 놓은 책이다. 


1967년 작품부터 2011년 작품까지 거의 45년을 아우르는 이 책은 그 시간적 차이가 거의 느껴지지 않을 만큼 동시대적이다. 지금 읽어도 여전히 유효한 사고 실험들이라 놀라우면서 동시에 슬펐다. 50년이 지나서도 같은 문제가 반복된다는 걸 증명하는 것이니까. 


15편 중에서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던 작품은 수전 팰위크의 「늑대여자」, 조안나 러스의 「그들이 돌아온다 해도」, 파멜라 사전트의 「공포」였다. 


「늑대여자」는 한 달에 한 번 사흘에서 닷새 가량 늑대로 변하는 늑대여자 '제스텔라'가 '조너선'이라는 인간 남자를 만나면서 겪게 되는 이야기다. 조너선을 만나 제스텔라는 둘로, 즉 늑대인 제시와 인간 여자인 스텔라로 쪼개진다. 이러한 외압에 의한 분열을 통해 제스텔라는 인간 사회로 편입되고 길들여지고 버려진다. 소설은 제스텔라가 제시로 혹은 스텔라로 조너선에게 길들여지는 과정을 날카롭고 비참하게 그린다. 


「그들이 돌아온다 해도」와 「공포」는 동전의 양면 같았다. 전자는 남자가 사라진 세상을, 후자는 여자가 멸종해 가는 세상을 그린다. 남자가 사라진 세상 속에서도 여자들은 결혼을 하고 아이도 가지며 가정을 꾸리고 산다. 그래서 느닷없이 등장한 남자들은 그들에게 무례하고 오만한 불청객일 뿐이다. 한편 여자가 멸종해 가는 세상은 마치 무법지대 같다. 남자들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이 세상은 위험하고 어지럽고 혼란스럽고 스산하다. 여기서 여자는 희귀종으로 취급된다. 보호라는 명목 하에 엄격하게 구속되고 위험 때문에 남편이나 경호원 등의 보호 없이는 혼자 밖에 나갈 수도 없다. 이런 세상에서 여자는 남자가 자신의 권력을 과시할 수단으로 이용되거나 구경거리로 전락한다. 인구수는 점점 더 줄어들고 사회는 갈수록 포악해진다.


이렇듯 이 두 단편을 비교하고 있자니 문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여자만 남은 세상이 일견 평화롭게 상상되고 남자만 남은 세상은 디스토피아로 그려지는 것을, 내가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어째서 나는 이런 가정법에 자연스레 동의한 걸까? 이걸 읽는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일까?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이 아니라 화가 난다면, 그것은 왜 그럴까? 이중 잣대라서? 편견이라서?


남자가 주류인 사회를 우리는 이미 벌써 계속 살고 있다. 오랜 세월 지구를 지배해 온(지금까지도) 가부장제가 그 증거다. 우리 사회는 교묘하고 뻔뻔하게 여성을 소거하고 생략해 왔다. 그러니 나의 반응은 실상 당연하다. 남성 지배 사회가 어떤 식으로 흘러가는지 아주 긴 세월 목격해 왔기 때문이다. 멀리 갈 필요도 없다. 앞서 언급한 「늑대여자」는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이러한 현실의 민낯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늑대여자」에서 남자가 여자를 다루는 방식은 「공포」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 희귀한 것이라는 차원에서 「늑대여자」의 제스텔라와 「공포」의 '조'는 동일하다. 그리고 지금 현실의 여자들이 일상에서 체감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즉 제스텔라가 인간 사회에서 겪게 되는 경험, 조가 집 밖에서 느끼게 되는 감정을 지금 여기 현실의 여자들도 그대로 겪고 느낀다. 어쩌면 그래서 SF 속에서 시행하는 여성 작가들의 사고 실험들이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하고 공명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물음표는 많다. "여자"라는 몸이 대체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이 생물학적 기호는 생각보다 더 많은 것들을 결정한다. 안타깝게도. 그래서 국경, 나이, 인종을 초월한 열다섯 명의 작가들이 자신이 앉은자리에서 보이지 않는 손을 맞잡고 이 소리 없는 혁명을 써낸 것은 위대하다. 공감하지 않을 수 없는 공통의 토대 위에 세워진 각자의 세계들은 때로 슬프고 때로 웃기고 때로 우울하지만 희미하게 약속하고 확인해준다. 지금 우리가 사는 현실에 대해서 말이다. 그것이 희망적인지, 비관적인지는 읽는 자의 몫일 테다.

매거진의 이전글 '퀴어'의 연애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