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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타 Apr 27. 2022

용서가 아니라 연민

「나쁜 피」

김혜지, 「나쁜 피」, 『릿터』 23



「나쁜 피」는 편지로 쓰인 한 여자의 탈출기다. 수신인은 전 시어머니. 거기에는 '보윤'이라는 여자의 인생에 호명될 수밖에 없었던 세 남자―양지훈, 희망이, 타이카가 등장한다.


탈출하기 위해서는 구속된 상황이 선행할 것이다. 화자는 무엇으로부터 탈출하였는가? 그녀가 갇혀 있던 감옥은 크게 두 가지 모습으로 추려진다.


하나는 아버지가 부재하는 가난한 '우리집'이다. 여기 가족이라 불리는 구성원들 즉 엄마, 여동생과 남동생, 그리고 화자까지 모두 각자 먹고살 길 찾기에 바빠 서로에게 무관심하다. 여상에 가야 했던 것도, 가고 싶은 대학에 가지 못하고 취업길로 들어선 것도, 그래서 야간대에 다녀야 했던 것도, 9년간 IT 계열 회사의 안내데스크에서 잘리지 않기 위해 몸가짐 조심하며 일해야 했던 것도, 모두 '우리집'이 못 살아서였다. 이때 '우리집'의 다른 이름은 '한국'일 것이다. 한국에 있는 한 화자는 자신이 처할 수밖에 없었던 틀로부터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거라고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아마도 그래서 양지훈이란 남자의 아내가 되어 뉴질랜드로의 탈출을 감행한 것이 아니겠나.


한국을 떠나면 탈출할 수 있을 거라 믿었던 감옥은 '남편'이라는 새로운 외피를 입고 '시댁'이라는 미명 하에 뉴질랜드까지 따라왔다. 자명하게도 그녀의 탈출은 실패했다. 자신이 여전히 감옥 속에 있다는 사실을 화자는 뉴질랜드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깨닫는다.


결혼 전 남편이 보여줬던 사진들처럼 뉴질랜드로만 가면 모든 것이 아름답게 해결되리라 믿은 화자가 순진했던 것일까. 아니면 남편의 진면목(?)을 알고도 못 본 척했기 때문일까. 시댁은 멀수록 좋다던 친정 엄마의 말에 너무 기댔던 탓일까. 그녀는 미처 몰랐다. 아마 그 정도일 거라고는 차마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함께 뉴질랜드행 비행기를 탄 '남편'이라는 것이 실은 그녀가 벗어나고자 했던 한국의 지저분한 모든 모습을 응축해 놓은 무엇이었다는 점을 말이다. 그녀는 한국을 떠났지만 한국을 떠나지 못했다. 왜냐하면 뉴질랜드에서도 그녀는 '보윤'이 아니라 양지훈의 아내였기 때문이다. 그녀의 순진함과 무지함이 결국 문제였나? 정말로 모든 문제의 원인은 그녀의 죄에 존재하는 걸까?


화자에게 결혼은 우선 갑작스럽고 다음으로 소모적이며 끝으로 경멸스러운 일이었다.


양지훈은 대기업을 다니다 그녀가 근무하던 회사로 이직한 남자였다. 화자보다 세 살 많았던 남자는 그 IT 회사에서도 오래 버티지 못하고 퇴사했다. 그는 퇴사하던 날 안내데스크에 선 그녀에게 커피 한 잔을 하자고 말을 걸었다. 화자는 사내의 가십거리들으로부터 거리를 두기 위해 꽤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덕분에 같은 회사에서 9년간 일할 수 있었다. 화자가 자신의 경계심을 풀고 양지훈의 대시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가 퇴사 후 뉴질랜드로 간다고 한 사실 때문이었다. 퇴사한 데다 곧 있으면 국외로 나가버릴 남자. 한 번 보고 돌아서면 그만일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화자는 선뜻 자신의 번호를 양지훈에게 줬다. 명문대 졸업, 대기업 취직을 제외하곤 장점이랄 게 없었던, 아주 많이 볼품없었던 그에게.


그런데 갑작스럽게 양지훈은 화자의 남편이 되어버렸다. 그것도 딱 세 번의 데이트만에. 첫 번째 데이트는 커피를 마시며 서로를 간 보는 과정이었다. 앞으로 일어날 일의 전조―양지훈은 자신이 삼대독자라고 말했다―는 이미 첫 만남에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화자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두 번째 데이트에서 양지훈은 지나치게 술을 많이 권했고 그에 응하다 화자는 취할 정도로 술을 마셔버렸다. 좀 흐트러지고 싶었던 화자는 곧 분위기에 휩쓸려 양지훈과 자버렸다. 그리고 세 번째 데이트에서 양지훈은 식사 후 곧바로 모텔로 향했고 화자를 집요하게 덮쳤다. 그렇게 끝날 거라고 생각했던 관계는 테스트기에 두 줄이 그어지면서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흘렀다. 분명 화자는 피임을 했다고 하는데 아이는 어떻게 들어선 것일까. 어쨌든 화자는 결혼식을 올린 후 바로 뉴질랜드로 가겠다는 양지훈의 말만 믿고 그의 프러포즈 같지 않은 프로포즈―애가 생겼으니 결혼하자는―를 받아들인다.


시어머니는 뱃속에 든 아이 즉 희망이 때문에 마지못해 화자를 며느리로 들였다. 처음부터 대학도 못 나온 여자라고 화자를 깎아내렸고 사돈, 그러니까 화자의 엄마에게는 반찬 하는 여자라며 남들 앞에서 비웃었다. 시어머니는 화자의 모든 것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결혼을 허락한 유일한 이유는 화자가 자기의 아들, 그 집안의 삼대독자인 아들의 씨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씨의 절반은 화자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는 그 여자의 유일한 '손주'가 될 것으로 예정되었다.


그래서 당연하게도 결혼 준비 과정은 화자에게 소모적이었다. 시어머니에게 영혼 없이 끌려다니며 결혼식장에 이르렀고 멍한 표정의 결혼사진 한 장을 남기게 되었다. 그러나 진정한 감옥 생활은 거기서부터가 시작이었으니. 결혼은 갑작스러움, 소모적임을 넘어 경멸과 모욕으로 향해 갔다. 아주 가파르게.


뉴질랜드에서 화자는 미드와이프(조산사) 타이카를 만난다. 친정 엄마를 제외하곤 유일하게 그녀를 '보윤'이라고 부르는 사람이다. 그는 진심 어린 눈으로 먼저 그녀를 걱정한다. 남편을 포함해 시댁의 모든 사람들이 산모가 아니라 아이에게만 관심을 둘 때 타이카만이 그녀의 몸과 마음에 귀 기울인다. 그와의 면담이 그녀에게 허락된 유일한 다른 사람과의 대화 시간이었다. 거기서 그녀는 누가 데려가 줘야 사진에서 봤던 와카티푸에 갈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 지금 상황이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 모두에게 처음이 있다는 사실을 희미하게 깨달아간다.


그러나 상황은 파국으로 치닫는다. 쓰리고 아린 마음을 유일하게 공유했던 친정 엄마는 암으로 쓰러지고, 그런 상황은 개의치 않으며 자기만 생각하는―밤마다 당연한 듯 임신한 아내에게 섹스를 요구하는 남편, 그리고 손주와 아들만 걱정하는 시어머니는 그녀를 점점 더 구석으로 몰아넣는다. 그리고 우연히 그녀의 손아귀에 수갑이 들어온다. 엄마를 간병하기 위해 간 병원의 잔디 위에서 줍게 된 그 수갑. 무의식 중에 수중에 넣게 된 그 수갑은 뉴질랜드에서는 화자 혼자만의 놀이 기구―잠에 빠진 남편의 손목에 몰래 채웠다 풀곤 했던―가 된다. 그 차가운 마음 때문이었던지 아니면 처음부터 예정된 일이었는지 화자의 뱃속에서 희망이는 사라진다. 회복도 채 되지 않은 몸에 남편이 또 참을성 없이 손을 대기 시작할 때 그녀는 한국으로 쫓기듯 다시 비행기에 몸을 태운다. 인천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화자는 시어머니의 손에 잡혀 시댁으로 끌려들어 간다. 거기서 수갑은 시어머니가 그녀를 가둬놓기 위해 그녀의 손목에 채우는 무기가 된다.


이제 '시댁'은 진짜 감옥, 물리적인 감옥이 되었다. 그녀는 수갑이 채워진 채 그 집안에 갇혔다. 시어머니는 사정없이 그녀를 구타했고 시아버지는 아무것도 못 본 채 했다. 자신의 '손주'가 떨어진 것은 모두 산모 탓이었고 산모가 몸을 잘못 굴려, 그러니까 며느리가 외도하는 바람에 유산이 된 것으로 이미 결론 내려져 있었다. 그리하여 화자는 온몸을 날려 가까스로 탈출해 다음과 같이 외친다.


"살려 주세요."


이번에는 정말 탈출에 성공한다. 그녀는 이혼 후 홀로 뉴질랜드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공항에서 시어머니였던 '당신'에게 편지를 쓰며 그간 있었던 일들을 담담하게 정리한다. 그리고 편지의 말미에서 '당신'을 '연민'한다고 말한다.


「나쁜 피」는 이제는 '익숙해진' 이야기를 한다. 재력, 권력, 집안, 그 무엇 하나 볼 것 없는 한 여자가 한국 사회에서 결혼이라는 것을 하게 될 때 겪는 것 말이다. 결혼 전 사내 성추행과 데이트 폭력부터 결혼 이후 남편을 포함한 시댁 식구들의 물리적, 정신적 폭력까지. 단편 속에는 외부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아내에게 풀며 가부장적 폭력을 서슴없이 휘두르는 남자, 아들이 그런 남자가 되도록 키운 시어머니, 시댁의 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이혼한 여자가 등장한다. 이 인물들은 지금은 지독히 '진부'해졌다. 누군가는 다음과 같이 아무렇지 않게 한 마디 하며 지나갈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또 그 얘기야?"


그렇다. 또 그 얘기다. 누군가는 이렇게 반응할 것이기에 이 이야기는 계속되어야 한다.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는데 사람들은 지루해하고 짜증 낸다. 이 스토리를, 단편 속 이 주인공들을 '진부한' 것으로 치부하는 현실. 그래서 '또' 이 얘기를 해야만 한다.


다 읽고 나서도 며칠간 내 뇌리를 떠돌았고 덮어놓은 책장 위에서 자꾸만 어른댔다. 이 글을 보고 다시금 새삼스레 느꼈다. 여전히 세상은 소설보다 더 잔인하고 혹독한 호러 스릴러라는 사실 말이다. 단편 속 '보윤'은 생존하여 탈출에 성공하지만 현실 속 '보윤'도 그녀처럼 위자료를 받고 홀로 뉴질랜드행 비행기를 탈 수 있었을까? 현실은 이 단편처럼 간략하게 성공한 '탈출기'로 서술되기 어렵다. 그래서 자꾸만 얘기해야 한다.


화자는 시어머니를 차마 용서할 수는 없지만 '연민'한다. 용서는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하는 행위다. 용서란 죄를 지은 사람과 그로 인해 상처 입은 사람이 명확하다. 죄인은 피해자에게 용서를 빌어야 하는 구조다. 그래서 화자는 시어머니를 '용서'할 수 없다. 시어머니 역시 피해자라는 사실을 화자가 어렴풋이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화자가 겪은 폭력 속에서 과연 피해자와 가해자가 명확히 구분될 수 있을까. 어쩌면 모두가 피해자인 것은 아닐까. 심지어 양지훈조차. 그녀가 뉴질랜드로 가지 않았다면, 혹은 희망이가 사라지지 않았다면, 그리하여 양지훈 같은 아들이 태어났다면, 자신 또한 시어머니처럼 되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있을까? 희망이가 태어나 한국에서 살았다면 양지훈처럼 자라지 않으리라고 보장할 수 있을까? 헤어 나오지 못할 우물 속에서 모두가 아등바등거리며 허우적거리고 있는 건 아닌지. 아마도 그래서 화자는 시어머니를 연민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용서는 이미 불가능한 것이니.


이 이야기 속에서 감옥에 있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남편인 양지훈도 한국이든 뉴질랜드든 어디서도 집단 속에 섞여 들지 못하고 겉돈다. 그에게는 언제나 해결되지 못하는 갈망과 욕망이 쌓여가고 이것을 잘못된 방향으로만 배설하려 한다. 시어머니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삼대독자인 아들을 통해서만 확인받았을 자신의 존재. 그러니 모두가 감옥 속에 있으면서 그것이 감옥인 줄 모르고 그저 산다. 어디에 갇혔는지 알지 못하니 당연히 탈출은 범주 밖의 일이다. 여기서 유일하게 뉴질랜드에 사는 제삼자인 타이카만이 이로부터 자유롭다.


타이카는 남성 조산사다. 화자의 남편과 시어머니는 당연히 조산사는 여자일 거라 생각하여 남자인 타이카를 껄끄러워한다. 우리는 어째서 (산부인과) 의사는 남자인데도 조산사는 여자여야 한다고 간주하는가. 타이카는 그런 편견을 뒤집으며 등장한다. 한국인인 우리의 눈에는 특이한 '남성' 조산사지만, 뉴질랜드에서 그는 그저 '미드와이프'일뿐이다. 그렇게 타이카는 화자의 인생에 조금씩 금을 만들어 간다. 남편이 데려가 줘야만 와카티푸에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누구에게나 처음이 있으며, 자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간다.


타이카는 제삼자다. 화자와 가족으로 엮이지도 한국어로 대화하지도 않는다. 그는 화자의 일상에서 유일하게 자신과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는, 그러니까 '한국'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인물이다. 그녀의 조산사라는 사실을 제외하곤 그녀에게 철저히 타인인 셈이다. 그럼에도 오직 그만이 화자와 희망이를 존재 자체로 대하며 진심으로 마음을 쏟는다. 화자는 뉴질랜드로 이주한 후에도 지속적으로 시어머니의 감시 하에 놓이고 남편의 온갖 요구에 순응해야만 했다. 비행기를 타고 바다 건너 멀리까지 갔지만 그곳도 한국과 별 다를 것이 없었다. 타지인데도 타지가 아니었던 셈이다. 그런 생활 속에서 만난 타이카는 인종도, 언어도, 성별도 모두 화자와 다르지만 누구보다 그녀의 가까이에 있다. 그 누구도 환대하지 않았던 그녀를 아무 조건 없이 받아들인 것은 가족이 아니라 '타이카'라는 완전한 '남'였다. 아무것도 연결되어 있지 않는 타이카만이 아이를 유산한 그녀의 마음을 위로하며 그것만이 그녀의 최선이었음을 알아준다.


타이카의 존재는 무엇을 지시하는가? 단순히 뉴질랜드라는 나라가 성차별 없는 유토피아임을 피력하는 장치에 불과한가? 만약 그들이 이민 간 나라가 백인 사회가 아니었더라도 그의 존재는 유효한가? 타이카는 어떤 장치로 기능하는가?


'타이카'는 우리의 상식밖에 있다. 남성 조산사인 데다 파케하로 패싱되지도 않는다. 다시 말해 백인도 아니고 남자면서 여자들이 하는 일에 종사한다. 즉 그는 우리, 그러니까 한국인이 생각하는 뉴질랜드라는 나라의 이미지에 걸맞지 않다. 그러면서 동시에 화자가 뉴질랜드 사진들을 보면서 꿈꿨던 이상에 대해 말하고 나누는 유일한 사람이다. 와카티푸에 어떤 전설이 있는지,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설명해주는 사람은 그녀를 뉴질랜드로 가게 한 남편이 아니라 타이카다. 따라서 '타이카'는 고정관념을 전복시키고 상식의 범주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를 재현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가족'이란 무엇인가?


한 여자의 탈출기는 타자의 개입으로 가족서사로 이어지고 다시금 우리는 가족의 정체에 대해 재고하게 된다. 단편의 제목 "나쁜 피"는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속담처럼 가족이라는 범주는 언제나 핏줄을 통해 형성된다. 따라서 이 제목은 혈연 중심의 가부장제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소설 속에서 피는 아버지를 통해 매개되지 않는다. 양지훈의 가족에서도, 화자의 가족에서도 아버지는 부재한다. 두 가정을 각각 지탱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어머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피는 때로 근본이 없는 것으로 치부된다. 처음 뱃속에 희망이를 가지고 인사를 갔을 때 시어머니가 며느리가 될 화자를 향해 한 말처럼. 편지 말미에서 화자가 시어머니를 향해 당신 아들이 당신을 닮아 그렇다는 비난을 하는 것처럼. 이와 동시에 나쁜 피는 임산부가 하혈하는 것을 가리킬 수도 있을 듯하다. 산달이 되지 않는 임산부의 하혈은 곧 유산이니 '좋은 피'로 간주되지 않는다. 특히 남아를 가지고 있다가 하혈하게 되면 더 큰 파장을 불러오곤 한다. 전자든 후자든 자궁을 통한 피는 좋은 의미로 해석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자궁에서 나온다. 그러니 가족이란 나쁜 피를 피할 수 없다. 폭력은 이미 언제나 거기에 내재해 있다. 애초에 우리가 좋은 피를 가진 적이 있긴 했던가. 원죄의 책임을 누구에게 전가할 수 있겠는가.


가족은 가해자 대 피해자와 같은 이분법으로 재단하여 사유할 수 없다. 이 소설 속에서 용서는 불가능한데 연민으로의 귀결은 필연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따라서 화자가 겪은 모든 갈등과 문제의 원인은 단일하고 자명하고 명료한 어떤 것에 있지 않다. 차별과 억압은 실상 여기저기 만연해 있다. 가장 따뜻하고 편안하고 행복할 것으로 간주되는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특히 그러하다. 이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알고도 모른 척하며 인정하려 하지 않거나 회피하려 들면, 그리하여 원인을 약자에게 환원하고 배설한다면, 유산한 며느리를 방에 가두고 유산의 원인을 그녀의 바르지 못한 몸가짐으로 단정 지어 윽박질르는 상황으로 귀결된다.


그러니 우리가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은 인정하는 일이다. 가족이라는 것이 그다지 아름답지 않다는 것, 뉴질랜드로 이민 간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 문제를 피하면 언제든 더 큰 돌덩이가 되어 되돌아온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연민의 마음. 벌어진 모든 사건은 간결하게 하나로 정리될 수 없다. 시어머니는 그녀대로의 사정이 있을 것이고 양지훈 또한 그럴 것이다. 그래서 용서가 아니라 연민이다. 그것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지 않나.


(여담)

그럼에도 문제들은 계속 거기 있다. 여전히. 보윤은 위자료가 든 통장을 들고 뉴질랜드로 떠났으나, 우리는 지금도 여기에 있다. 그래서 뭔가 찝찝하다. 연민이라는 말은 너무 납작하고 인정이라는 말은 지나치게 관대해서 재수 없다. 정말 우리는 양지훈과 그의 어머니를 연민할 수 있나? 가령 보윤이 타이카를 만나지 못했다면? 현실 속에서 타이카를 만날 확률은 얼마나 될까? 타이카가 혹 유니콘이라면? 뉴질랜드는 여전히 우리의 상상 속 유토피아 아닌가? 양지훈의 입장은 누가 써 주나? 보윤이 뉴질랜드에 갔다가 한국에 돌아오면 이혼녀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닐 텐데 괜찮을까? 물음표가 꼬리에 꼬리를 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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