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영」
임솔아, 「단영」, 『악스트』 30
효정이 하은사에 온 이후로 처음 얻은 깨달음은 불경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은 것이었다. 출가를 한 승려는 무성의 존재로 살아가야 한다는 규율은 누구나 다 아는 전제조건이지만, 비구니는 결코 무성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 신도들은 이상적인 여성성을 하은사에서 만끽하고 싶어 했다. 효정은 그들의 욕망에 부합하는 것이 쉬웠다. 어떤 감정 속에 놓여 있든 부드러운 미소를 지을 수 있게 되었을 때, 하은사는 유명한 비구니 사찰이 되었다. 효정은 은사 스님으로부터 주지 직책을 받았다. 두 명의 제자가 더 있었지만 은사 스님은 세 번째 서열인 효정을 주지로 택했다. 비구니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온화한 미소였다는 사실을 가장 잘 이해한 효정의 승리였다. (107쪽)
머리를 깎든 안 깎든, 여자는 여자다. 어떤 옷을 입든, 여자는 여자다. 비구니도 이 자명한 현실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그러니 승려가 여성이면, 그는 무성의 존재일 수 없다. 오히려 승려이기에 비구니는 더더욱 이상적인 여성성을 구현해야만 한다. 왜? 비구니는 속세를 벗어난 '여자'이기 때문이다. 비구니는 단지 현실을 초월해 있는 '여자', 고즈넉한 산속에서 부처를 모시며 사는 '여자'로 간주된다. 그러므로 비구니로서 성공적인 입지를 다지기 위해서는 어떤 상황에도 "온화한 미소"를 지을 수 있어야 한다. 세상 모든 것을 다 품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이상적인 '어머니'라는 판타지를 구현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면 비구니도 뭇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다.
여자가 사랑받는 방법은 간단하다. 어리거나 예쁘거나 어머니거나. '여자'인 비구니가 긴 세월 살아남기 위해서는 가장 이상적인 어머니가 되어야만 한다. 아이 없이 누구보다 이상적인 어머니의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 단편소설 「단영」의 효정은 이 사실을 일찌감치 간파했다. 그리하여 일 년 내내 색색의 아름다운 꽃이 만발한 하은사는 자궁터에 자리 잡은 유명한 사찰이 되었다.
「단영」은 사랑받기에 실패한 여자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학교에서 문제를 일으켜 대안교육 명령을 받았던 아란, 조선족이자 공양주 보살인 조와 주, 절에서 두유 젖병을 빨며 나고 자란 열두 살의 단영. 이렇듯 하은사에는 버림받거나 천대받거나 낙인찍힌 여자들이 모인다. 이들 외에도 이혼한 여자, 낙태를 한 십 대, 십 년 동안 임용고시에 떨어진 여자 등 사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여자들이 하은사로 흘러든다. 그러나 거기에서도 이들은 사랑받는데 실패한다.
그래서 하은사의 여자들은 밤이면 잠들지 못한다. 하은사의 고요한 밤을 버티지 못한 여자들은 그곳에서조차 이상한 여자, 거짓말하는 여자, 헛소리하던 여자로 취급되어 어느 날 사라진다. 그렇게 소위 미친 여자들이 증발한다. 타자가 요구하는 여성성에 부합하지 못한 여자들의 증발은 공동체에 안도감을 부여한다. 여자의 상실은 부드러운 웃음으로 매끈하게 지워지고, 판타지는 언제나 그렇듯 견고하게 지속된다.
그러나 이 판타지 역시 위태롭다. 하은사의 아름답고 이상적인 이미지를 단단하게 지탱하는 효정도 하은사의 밤을 무사히 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밤마다 남몰래 화단의 꽃을 짓밟고 다닌다. 하은사의 판타지를 유지하고 신도들의 욕망에 부합하기 위해서 말이다. 지저분하게 지는 꽃의 모습을 지우기 위해 밤마다 부지런히 꽃을 짓이기는 비구니. 대낮의 온화한 미소는 이런 비밀 밤마실을 통해 유지된다. 꽃을 짓이기는 밤 없이 부드러운 미소를 띤 비구니 효정은 존재할 수 없다.
이 이중성을 열두 살의 단영은 알고 있다. 그리고 이 진실을 대놓고 지적하는 데, 단영은 망설임이 없다. 햄버거를 위해 서슴없이 승려라는 장래희망을 버린 아이. 쉬지 않고 재잘거리며 절의 고요함을 깨버리는 아이. 그래서 효정은 단영을 절에서 내보내려 한다. 하은사의 판타지는 이 아이의 증발을 전제로 해야만 흔들림 없이 이어질 것이다.
이 사실을 알고 아란은, 그러니까 열일곱에 절에 들어왔다가 나간 후 스물넷이 되어 다시 하은사에 들어온 아란은 단영에게 갈 곳을 만들어주기로 약속한다. 곧 쫓겨날 단영을 위해 자신이 이 아이만의 어떤 장소가 되기로 한 것이다. 오직 단영만을 위한 약속을 하고, 그렇게 아란은 스스로 가야 할 곳을 만들었다. 환상을 지탱하기 위해 상실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상실을 끌어안음으로써 아란은 다른 형태의 '여자'가 될 것이다. 사랑받는 존재가 아니라, 사랑하는 존재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