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한 유령」
장진영, 「우아한 유령」, 『자음과 모음』 45
까먹은 주소는 어디로 갔을까? 「우아한 유령」의 주인공 보라는 잠결에 아버지로부터 어떤 주소를 들었다. 안타깝게도 머리가 나빴던 보라는 그것을 금방 잊어버렸다. 주식 조작 혐의로 투옥된 보라의 아버지는 산책하듯 탈옥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자신만 아는 그 주소를 딸에게 알려주기 위해 아버지는 마지막 산책을 감행했다. 금세 까먹어버린 이 주소로 인해 보라의 삶은 보물 찾기의 무대가 된다.
주식도 보물 찾기의 일종인 것 같다. 주식의 보물은 아마도 잠재력일 것이다. 지도가 좀 어렵고 모호해서 해석하기 나름이라는 명백한 단점이 있지만, 어쨌거나 모두에게 주어지는 지도가 있고 그것은 장밋빛 미래를 보장하는 어떤 것을 가리킨다. 지도가 지시하는 방향대로 따라가 잘 찾기만 하면 된다. 이것은 희망이다. 보물 찾기가 보물이 어딘가에 있다는 희망을 주듯이.
주식과 보물 찾기는 희망 외에도 불확정성이라는 또 다른 공통분모를 가진다. 우리는 종종 희망만 보고 불확정성은 간과한다. 희망은 딸 수도 있는 돈 혹은 찾을 수도 있는 보물로부터 생겨난다. 즉 획득될 거라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상상력을 발휘해 희망이라는 환상을 만든다. 이 희망은 아직 오지 않은 것의 상실을 전제한다. 그리하여 "이미 잃은 수백수천보다 딸 수도 있었던 10원 한 장이 더 가슴 아픈"(217쪽) 현실을 만들어낸다.
가능성은 언제나 불확정적이다. 될 가능성은 되지 않을 가능성이 병존할 때만 성립한다. 둘 중 어느 쪽이 될지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도래하지 않은 미래는 생기지 않은 이익과 찾아지지 않은 보물의 존재를 입증하며 오늘을 무너뜨린다. 보라 아버지의 주가조작으로 인해 서른네 명의 사람이 자살해버린 것처럼. 아버지가 일러주었지만 "눈을 감는 즉시 까먹은"(208쪽) 그 주소를 찾아 대부도의 여관방에 이른 보라의 인생처럼.
보라는 어린 나이에 혼자가 되었다. 엄마마저 운명의 사랑을 만나 파두를 듣기 위해 포르투갈로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홀로 남은 보라의 삶은 아버지가 말해준 주소, "훗날 가짜 심마니들이 작대기로 땅을 쑤시고 다니며 찾아 헤맬 주소"(208쪽)를 기억해낸다는 조건 하에 연명되었다. 그렇게 그녀는 오로지 이 조건 속에서만 가능한, "임시적이고 유예적인 삶"(210쪽)을 얻었다.
그러나 우리는 주소에 있을 그것이 뭔지 끝내 알 수 없다. 보라가 대부도의 밭을 멧돼지처럼 헤집고 다니며 찾던 그것, 순경인 재호가 2년간 보라와 함께 대부도의 온갖 곳을 수색하며 발굴하려 했던 그것, 재호의 기동대 동기면서 직급이 높았던 권이 대부도 발령에 대해서 억울해하지 않았던 이유인 그것 말이다. 그것은 소설 속에서 단 한 번도 제대로 호명되지 않은 채 사람들을 홀린다. 마치 유령처럼. 저 넓은 바다 아래에 잠겨 있을 보물선처럼. 모두가 등장하지 않는 그것을 두고 같은 생각을 한다. "찾기만 하면"(213쪽)이라고.
"~한다면"이라고 생각하거나 말할 때, 아직 오지 않은 미래는 생성된다. 모두가 "찾기만 하면"이라고 생각하기에 드넓은 바다 아래 침몰한 보물선이 존재한다. 바다가 너무 넓어서 없는 것이나 다름없음(214쪽)에도 우리가 "찾기만 하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은 있는 것이 된다. 보라가 무용수인 이유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발레를 하거든요."(210쪽)라고 말한다. "댄스를 춰요."(216쪽)라고 발화함으로써 보라는 제 발로 한 번도 춤춰 본 적이 없지만 무용수가 된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공격하듯 지적하는 보라의 팔자걸음은 결점이 아니라 무용수인 증거로 여겨진다. 부조리하지만, "해석의 차이"(216쪽)는 본래 부조리한 방식으로 기능한다.
발화하는 순간 가능성은 현실이 된다. 그래서 보라는 어느 날 마음을 정했다. 대부도의 곳곳을 돌아다니며 땅을 파고 무언가를 발굴했다. 누군가 버리고 갔을 온갖 잡동사니들, 그러니까 "예쁘고 뾰족한 쓰레기들"(215쪽)을 주워 여관 달방 창틀에 올려두었다. 마치 "힌트처럼"(210쪽). 소설 속에서 유일하게 정돈된 풍경이다. 어른스럽지 않은 어른들 곁을 떠난 보라가 누구도 눈길을 주지 않은 것들에 손을 내민다. 굳이 찾을 생각을 하지 않는 버림받은 것들. 어딘가에서 떨어져 나왔을 파편들. 흙이 묻어 지저분한 것들. 보라를 통해 그것들은 비존재에서 존재가 된다. 보라에게 사촌언니가 그러했듯이.
소설 속에서 사촌언니는 자기 할 일을 제대로 한 유일한 인물이다. 보라에게 아무런 조건도 걸지 않은 사람은 이 언니밖에 없다. 그녀는 보라가 두 번 깨물고 뱉은 게장을 아무렇지 않게 자기 입안에 넣고 씹는다. 어릴 적 보라와 몸싸움을 하다 자개장롱 모서리에 이마를 찧어 흉터가 생겼지만 그녀는 보라를 탓하지 않았다. 오히려 보란 듯이 그 흉이 진 이마를 까고 다닌다. 그래서 사촌언니에게 그 흉터는 결점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보라는 언니의 미간을 보면 가슴이 미어진다. 이렇게 아프고 곤란한 방식으로 언니의 흉터는 보라의 존재를 입증한다. 삼촌 집을 나올 때 장롱의 자개를 깨서 가지고 나온 이유도 그래서일 것이다.
보라는 "그늘져"(211쪽) 보이고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인상을 주는"(210쪽) 인물이다. 그 자체로 뿌리를 상실한 결핍이자 부조리다. 무언가를 찾는 사람 같지 않게 그것을 찾고, 제 발로 춤춰본 적 없지만 무용수이며, 앞뒤가 맞지 않는 거짓말을 마치 진실처럼 말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보라가 불편하다. 그녀의 결핍이 자신의 결핍을 상기시키고 일관성에 흠집을 내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이 사촌언니의 흉터를 놓고 앞머리로 가리거나 레이저 치료를 통해 지우는 방법을 이야기하는 것도 이와 동일하다.
흠은 가리거나 없애야 하는 것으로 치부된다. 결점은 눈에 보여서는 안 된다. 부조리는 논리와 합리성으로 봉합되어야 한다. 보라의 존재는 거북스럽게도 자꾸만 이 사실을 들춰낸다. 마치 기저귀나 휴지처럼. "남의 뒤치다꺼리하는 물건들", "태생적으로 구역질 나는 것들"(207쪽)인 기저귀나 휴지는 배설물과 항문처럼 불쾌한 것을 떠오르게 한다. 다 알고 있으면 모르는 척하는 그런 것을 굳이 연상시키니 거슬리고 못마땅한 것이다. 즉 보라는 "자기 묫자리를 알아보러 다니는 노파, 칼춤을 추는 무희, 시지포스, 소작농, 도굴꾼, 수인"(210쪽) 등 모든 하찮은 것들을 대변한다. 그러므로 멜랑꼴리하고 예측 불가능하며 엉뚱한데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모르는 게 없는 재호는 낚시 금지 팻말이 있는 곳에서 낚시를 하는 흰 바지의 사내(보라의 아버지)를 붙잡아 상을 받고, 아는 게 없는 보라는 쑥을 캤다. 재호가 상 받으러 서울에 간 사이 보라는 파출소 팀장에게 튀겨 드시라며 비닐봉지를 내민다. 아마도 쑥은 보라가 아버지로부터 들은 주소에서 찾아낸 "그것"인 듯하다. 보라에게 "쑥"은 "사악한 독"이자 "마귀할멈의 시험"이고 "음모"다(218쪽). 왜냐하면 "그것" 때문에 보라의 인생은 유령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보라의 얼굴에서 사람들은 보라가 아니라 보라 아버지의 주소를 보고 아직 찾지 못한 보물을 떠올린다. 보라가 주소를 기억하지 못함으로 인해 본래 없던 보물은 잃어버린 것으로 변신한다. 그리고 보라의 얼굴은 상실된 보물을 지시하는 고장 난 나침반에 불과해진다. 존재하지만 없는 것이 되는 마법. 그래서 보라는 모든 사람들이 찾아다니는 그것, 그러니까 보물로 불리는 그것을 그냥, 흔하디 흔한 쑥으로 바꿔버렸다. 지천에 널려서, 있는 줄도 모르는 초록색 풀. 아버지의 보물을 쑥으로 치환함으로써 보라는 오래된 복수를 완성했다. "최고는 아니지만 덜 나쁜 쪽으로."(21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