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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타 May 15. 2022

부어오른 발

「오이디푸스 왕」②

소포클레스(천병희 역, 2008), 「오이디푸스 왕」,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 



'오이디푸스'라는 이름은 세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우선 그리스어 오이도스(oidos, 부어오른)와 푸스(pous, 발)의 합성어로 보면 '오이디푸스'란 '발이 부어오른'이란 뜻이다. 이 해석은 라이오스 왕의 신하가 오이디푸스를 키타이론 산에 버렸을 때 그의 두 발목에 구멍이 뚫려 양발이 퉁퉁 부어 있었다는 텍스트 내용에서 유래한다.


다음으로 '부어오른 성기', 즉 '발기된 음경'이라는 의미다. 이 의미는 그리스어 푸스(pous)의 기표가 그리스에서 남성 성기를 지칭하기도 했다는 점에 근거한다. 발이 성적 이미지와 연관되기도 하므로 부어오른 발은 발기한 페니스로 치환될 수 있다. 그랬을 때 '오이디푸스'는 근친상간에 대한 환유로, 오이디푸스의 실명은 근친상간에 대한 처벌인 거세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끝으로 '오이디푸스'는 '나는 발을 안다'로 읽히기도 한다. 오이다(oida)를 '나는 본다'라는 뜻의 그리스어 에이돈(eidon)의 과거형으로 보면 그렇다. 오이다(oida)는 엄밀하게는 '나는 보았다'지만 보통 현재 동사의 의미로도 쓰인다. 이 해석은 스핑크스가 오이디푸스에게 던지는 "아침에는 네 발, 점심때는 두 발, 저녁에는 세 발로 걷는 것이 무엇이냐?"라는 수수께끼의 답과 관련한다. 


세 가지 의미에서 공통되는 것은 발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발은 인간을 규정해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였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땅 위를 걷는 존재다. 신은 땅 위를 걷지도 않고 땅 위에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땅 위를 걷는다는 것은 인간과 신을 구분 짓는 가장 큰 차이점이자 인간을 정의 내리는 본연의 성질로 여겨졌다. 따라서 '발을 안다'는 결국 '인간을 안다'는 것이고, 이는 오이디푸스의 스스로를 알고자 하는 욕망과 연결된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 그 근원에 대해 알고자 하는 열망이 컸다. 극구 말리는 이오카스테 왕비의 말에도 전혀 귀 기울이지 않았다. 스스로 누군지 알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고 이 욕망이 끝내 실명이라는 파멸에 다다르게 했다. 그러니 결국 '오이디푸스'라는 이름은 두 발로 땅 위를 걷게 된 순간부터 삶이 자기 존재에 대한 질문을 향한 여정이자 방황이 될 것임을 예언한다. 그것도 아주 험난하고 비극적인.


이 고난과 시련은 오이디푸스가 태어난 순간부터 이미 예견되어 있었다. '오이디푸스'의 의미가 그냥 '발'이 아니라 '부어오른 발'이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는 발목에 구멍이 뚫려 부어오른 비정상적인 발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비정상성은 그를 불구자로 정체화하게 한다. 게다가 오이디푸스는 버려진 아이였다. 몸도 성치 않은데 부모로부터 버림받기까지 한 것이다. 이렇듯 그의 존재는 애초에 고칠 수 없는 결함과 채워지지 않는 결핍으로부터 출발했다. 이러한 불완전한 토대는 오이디푸스로 하여금 자신의 존재에 대해 강한 의구심을 표출케 했다. 그러나 이 욕망은 그의 오만과 불손으로 말미암아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동침하는 비극에 이르게 했다. 


오이디푸스는 스스로 눈을 찌른 후 자신이 버려졌던 키타이론 산으로 돌아가겠다고 결정한다. 그의 정체성은 결국 그곳, 자신이 버려졌던 곳에 있다. 먼 길을 돌고 돌아 다시 결함과 결핍이 있던 그 자리로 회귀하는 것은 어쩌면 필연적이다.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정하지 않는 한, 인간은 오이디푸스처럼 지난하고 힘겨운 과정을 거쳐 제자리로 돌아간다. 인간의 실존은 불안정하고 불완전하다. 견고하고 흔들림 없는 토대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이디푸스의 삶은 이 자명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맞이하게 되는 최대치의 비극을 보여준다.


인간 모두는 오이디푸스의 '부어오른 발'처럼 본디 비정상적이고 이상하고 쩔뚝거리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스스로에게 묻고 또 물을 수밖에 없다. 여긴 어디고 나는 누군지를 말이다. 삶이 죽음으로 향하는 여정이 방황이 되는 건 그러므로 당연하다. 그러니 겸허해야 하지 않을까. 한낱 인간 주제에 뭐가 그렇게 잘났다고 서로 까부는가. 고작 네 발로 걷다가 두 발로 걷고 세 발로 걷는 것으로 끝나는 게 인간의 삶이라는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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