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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타 May 24. 2022

뻔한 이야기지만, 그래도.

「그래도 해피엔딩.」

서미애, 「그래도 해피엔딩.」, 『미스테리아』 35



스토킹은 처벌이 안 된다. 어떤 남자가 어떤 여자를 지속적으로 따라다니며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봐도, 그것으로 인해 그 여자에게 엄청난 스트레스가 발생해도, 둘 사이에 물리적인 폭력이 없으면 처벌은 불가능하다. 잠재된 폭력은 단죄할 수 없다. 그래서 여자는 그저 온종일 남자의 조용한 폭력을 감내하거나 관계 형성에 대한 무언의 강요를 수용해야만 한다. 예견된 물리적 폭력 앞에 여자는 속수무책이고, 이미 행해지고 있는 정신적인 폭력은 보상받을 도리가 없다. 그러니 아주 아주 불합리하다. 그런데도 무게 추는 여전히 한쪽으로 지나치게 기울어져 있다.


「그래도 해피엔딩.」은 스토킹과 데이트 폭력에 대한 단편이다. 남성의 스토킹이 어떻게 데이트 폭력으로 이어지는지를 피해자의 시점에서 조명한다. 어째서 선우가 자신을 스토킹 하던 지석을 남자 친구로 받아들이게 됐는지, 이 선택이 선우에게 불가피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어떤 배경이 그녀를 폭력의 피해자로 몰고 갔는지를 묘사한다. 사건은 전적으로 피해자의 입장에서 설명되고, 또한 가해자에게 변명할 틈을 주지 않음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조금이라도 그를 동정하거나 이해할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마치 그럴 필요가 없다는 듯이.


가해자는 비상식적인 행동을 저지르기에 피해자보다 주목을 받게 마련이다. 그래서 어떻게 가해자가 그러한 일탈을 자행하는지를 분석하는데 많은 이들이 집중한다. 그러나 실상 가해자는 그렇게 입체적인 인물이 아니기도 하다. 사회적 약자에게 행해지는 그 범법 행위만이 충격적이고 자극적일 뿐인데. 비겁하고 저열한 이들에게 우리가 지나치게 많은 목소리를 부여하고 있는 건 아닌지. 그리하여 어리석게도 우리는 피해자가 받은 고통보다 가해자가 저지른 비행에 더 관심을 쏟곤 한다. 이로 인해 피해자는 사각지대 혹은 핀트가 나간 흐릿한 배경으로 밀려난다.


이 소설은 이것을 반전시킨다. 가해자를 끌어내리고 그 자리에 피해자를 앉혔다. 그 결과 피해자는 더 이상 단순히 "피해자"가 아니다. 자신만의 취향과 인격을 가진 "선우"로 재탄생한다. 피해자가 되기 전 선우는 훨씬 풍부하고 생기 있는 사람이었다. 소설은 이런 선우가 가해자로 인해 어떻게 피해자가 되는지를 아프고 예리하게 따라간다. 이때 소설은 선우가 단지 지석으로 인해서 피해자가 되는 것이 아님을 지적한다. 지석의 잠재적 폭력이 가시화될 때까지 방치하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 사회다.


지석의 비가시적 폭력은 장기간에 걸쳐 이어졌다. 이에 선우가 대처할 수 방법은 전무했다. 조금 내성적이라 누군가의 부탁을 잘 거절하지 못하는 선우의 성격을 지석은 지체 없이 이용한다. 사적인 공간까지 침투당한 선우는 지석을 견디지 못하고 이별을 고한다. 이때부터 지석은 가감 없이 폭력성을 드러낸다. 자신의 통제력을 상실하지 않기 위해 지석은 서슴없이 약자인 선우를 짓밟고 유린한다. 선우가 외부에 구조 요청을 하지만 사회는 그것을 아무것도 아닌 일인 양 웃어넘겨버린다. 좋아하는 마음이 조금 지나칠 뿐이니 선우에게 받아주라고 종용하면서. 사태의 심각성은 인지되지 않고 애초부터 왜곡된 관계는 더욱 균형을 잃고 뒤틀린다. 비가시적 폭력은 물리적 폭력이 되어 선우의 삶 전체를 망가뜨리는 지경에 이른다.


고립된 선우를 수렁에서 건져 내는 것은 옆집 여자 영경이다. 선우는 이 낯선 여자와의 연대를 통해 용기를 낸다. 스스로 칼을 손에 쥔 것이다. 선우가 지석의 손에 있어야 할 칼을 들고 보란 듯이 그의 예상을 비껴가는 언행을 할 때, 나는 빙긋이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미 뻔한, 다소 낙관적이고 희망 찬 이 결말이 나는 썩 마음에 들었다. 지독히 어긋난 균형이 "그래도" 미약하나마 맞춰지는 것 같아서. 애정과 소유를 혼동하는, "졸렬하고 흉한 몰골"(156쪽) 일뿐인 가해자의 추한 민낯을 들춘 것 같아서. 그러니 해피엔딩이다.


하지만 여전히 뭐가 해피엔딩인 건지는 잘 모르겠다. 죽거나 죽이는 것 밖엔 선택지가 없는 것이 과연 해피한 것인지, 그래서 죽는 것보다 죽이길 선택한 것을 해피엔딩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인지 말이다. 게다가 남겨진 선우에게 현실은 더 잔인하고 무거울 테다.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상흔이 생겼으니. 아마도 그래서 작가는 제목에 "그래도"를 붙였을 것이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생존한 선우가 끝까지 살아남길 바라는 마음에, "해피엔딩"이라 쓰고 마침표까지 꾸욱 찍은 것이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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