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디푸스 왕」①
소포클레스(천병희 역, 2008), 「오이디푸스 왕」,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
테이레시아스: 진실이 내 힘입니다.
오이디푸스: 누구에게 배웠느냐? 적어도 네 재주는 아니다.
눈먼 주제에 진실을 운운하는 예언자 테이레시아스가 오이디푸스 왕은 우습다. 그래서 (정작 자신이야말로 아무것도 모르면서) 왕은 무심코 면전에서 예언자를 비웃고 말았다. 그 진실을 누구에게 배웠냐면서. 그리고 너무 안일하게 단정 지었다. 혹 네가 진실을 알고 있더라도 그것이 네 재주는 아닐 거라고 말이다. (그러나 모두 알고 있듯 진실에 대해 일도 모르는 사람은 예언자가 아니라 왕이었지.)
테이레시아스를 향한 오이디푸스의 조롱은 근거가 분명하다. 테이레시아스가 장님이라는 점. 시쳇말로 앞도 안 보이는 병신이 뭘 안다고 지껄이냐는 투다. 이는 두 사람이 만나 언쟁하는 대목 곳곳에서 확인된다. 오이디푸스는 진실 혹은 앎이 물리적인 눈으로 '보는 것'에서 비롯한다고 생각한다. 시각으로 인지하는 것이 곧 '아는 것'으로 귀결되기에 그에게 눈먼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는 그저 "귀도 마음도 눈도, 모든 것이 어두운 자"에 불과하다.
오이디푸스는 '봄'[見]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한다. 이는 당시 그리스인들의 사고방식과 동일하다. 그리스인에게 산다는 것은 본다는 것이고 본다는 것은 안다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시각은 사물을 인식하는 능력 곧 로고스[이성]에 직결된 감각이었다. 이성은 절대적인 진리 탐구를 의미했고, 따라서 눈은 진리 탐구에 필수적인 지식의 주요 근원이었다. 즉 시각이 사물을 인식하는 능력의 기준이자 사리(事理)를 깨우치게 하는 발화점인 셈이다. 그러니 오이디푸스에게 본다는 것은 진리를 탐구할 수 있는 이성과 인식능력의 기틀을 만드는 수단이며 궁극적으로는 앎을 의미한다.
한편 테이레시아스는 오이디푸스와 정반대로 생각한다. 그에게 진실은 눈으로 보는 것으로부터 비롯하지 않는다. 그의 진실은 아폴론 신이 보는 것과 같은 것이지, 물질적인 세계를 가시적으로 보는 것으로부터 도출되지 않는다. 그래서 테이레시아스에게 오이디푸스는 "눈을 뜨고 계시면서도 얼마나 처참한 일에 빠지고 계신지 그리고 어디서 사시고, 누구와 함께 지내고 계신지 모르는" 오만에 찬 어리석은 인간일 따름이다.
테이레시아스는 눈의 감각을 완전히 신뢰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인간의 눈은 볼 수 있는 것만을 뇌에 전달한다. 시야 밖의 것은 인지할 수 없을뿐더러 물리적인 것 너머의 어떤 것도 지각할 수 없다. 그러니 시각으로 인식하는 것은 진실이 아니라 허구에 가깝다. 게다가 인간의 눈은 객관적이지도 않다. 인간은 종종 보고 싶은 것만을, 목전의 것만을 본다. (딱 오이디푸스처럼.) 하여 시각적으로 본다는 것은 테이레시아스에게 무의미하다. 그런 무의미한 것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미련한 짓이다. 그리고 (이미 알고 있듯이) 오이디푸스에게 일어난 일을 통해 이는 증명된다.
오이디푸스는 모든 진실, 그러니까 아버지를 살해하고 어머니와 동침했다는, 혹은 안티고네의 아버지이자 오빠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 자신의 눈을 찔렀다. 왜 찔렀을까? 눈먼 테이레시아스를 멸시하던 그는 왜 스스로 장님이 되는 선택을 했을까? 이 필연적 결말은 오이디푸스가 테이레시아스가 옳았음을 입증한다. 보는 자로서의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보지 못하는 자가 사실은 진실에 더 가까웠다는 것을 완전히 인정하는 제스처가 곧 스스로 눈을 찌르는 행위였던 것이다.
이렇게 앞을 못 보던 테이레시아스를 우롱하던 오이디푸스가 결국 스스로 장님이 됨으로써 소포클레스의 비극은 '보는 것'에 대한 무의식적 관념을 뒤집는다. 시각적으로 보는 것이 곧장 진실에 가닿지 않을 수 있다. 때로 오히려 보는 것이 진실을 흐리게 만들고 교란시키기도 한다. 그리고 보지 않는 것이 도리어 진실을 뚜렷하게 인식할 수 있게 한다. 「오이디푸스 왕」의, 보는 눈은 보지 못하는 눈이 되고 보지 못하는 눈은 보는 눈이 되는, 이런 역설 속에서 '보는 것'의 의미는 재창출된다.
시각은 허구를 내포한 채 인식의 체계를 구축한다. 그러니 본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될 수도 없고 보지 않는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될 수도 없다. 다만 본다는 것을 통해 지식을 축적하고 인식능력을 발달시키면서 그 속에 내포되어 있는 허구성을 깨닫는 역설 속에 진정 봄[見]의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