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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타 Jun 05. 2022

어느 날 문득 시나브로

「하나, 둘, 셋, 넷」

박하루, 「하나, 둘, 셋, 넷」, 미스테리아 29



어렸을 적 일은 누구에게나 희미한 법이죠. […] 가만히 생각해보면 가족이란 것도 보통 어떻게 해서 이렇게 모이게 됐는지 모호한 부분이 있지 않나요? 자의식이란 것은 나도 모르게 시나브로 생겨나는 것이므로 어느 날 문득 돌이켜보니 엄마 아빠와 형제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죠. (150쪽)


어느 날 문득 돌이켜보니 나를 부르는 이름이 있고 그 이름을 준 가족이 있다. 이름과 가족은 나도 모르게 시나브로 생겨난다. 언제 왜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 '나'는 모른다. 여기 '내'가 모르는 지점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문제는 '나'뿐 아니라 '너'도 진실은 모른다는 사실. 가족 모두 각자의 토막을 알고 있을 따름이다. 이때 그 토막들을 모두 모은다고 해도 진실은 재봉되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의 자리에서 '나'는 비어있는 기억들을 자신의 이야기로 기워 의미심장한 괴담으로 탄생시킨다.


단편 「하나, 둘, 셋, 넷」은 의뢰인이 어떻게 자신의 어린 시절을 정교하게 봉합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탐정 재건의 입을 빌려 섬뜩하고 기괴하고 신비로운 의뢰인의 이야기를 해체해 버린다. 그의 기억이 어떤 식으로 조작되고 실제로는 어떤 모습일지를 탐정이 심드렁한 태도로 까발림으로써 이야기가 지닌 초현실성을 제거한다. 그리하여 의뢰인의 이야기는 빛을 잃고 흔하고 슬픈 어느 가정의 가족사로 변형된다. 차마 어린아이에게는 말할 수 없었던 가슴 아픈 사연 말이다.


그러나 정말 의뢰인의 이야기는 그가 몰랐던 자기 가족의 슬픈 사연이 뒤집어쓸 수밖에 없었던 탈에 불과할까? 과학적이고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탐정의 추리를 통해 벗겨지는 가면이 정말 가면일 뿐일까? '나'와 '내 이름'을 구별하는 것이 가능할까? '나'에게 '그 이름'을 준 가족을 '나'와 분리시킬 수 있을까? 오히려 의뢰인의 왜곡된 기억이, 그 기억들이 기워낸 이야기가 일말의 진실을 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딘가에 숨어있는 사실이 있고 그것을 모른 채 어떤 의미를 완성시키기 위한 가면이 존재한다고 전제하는 것 자체가 실상 가설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현대 사회에서 보자면 허무맹랑하기 그지없는 수많은 신화가 도리어 과학이나 합리적 지성 내지 지식보다 인간과 세상에 관한 진실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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