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자타 Jul 05. 2022

악의 없는 낙관의 결과

「회색 여인」

엘리자베스 개스켈, 「회색 여인」, 『미스테리아』 30



내 금발은 회색이 됐고 피부도 잿빛이 되어버렸으니까. 십팔 개월 전 흰 피부에 금발이던 젊은 여성의 모습을 이제는 찾아볼 수 없었어. [...] 그들은 나를 회색 여인이라고 불렀어. (286쪽)


그녀의 이름은 아나. 18세기 후반 독일 네카어 강변에 있는 제분소의 딸이었다. 아나의 금발과 피부는 왜 잿빛으로 변해버렸을까? 그녀는 어쩌다 회색 여인이 되었을까? 모든 사건의 전말은 그녀의 결혼에 있다. 소설은 아나가 자신이 누구와 어떻게 결혼하여 무슨 일을 겪었는지 딸 우르줄라에게 알려주는 편지의 형식을 취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남은 평생 무정한 요부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면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선택지인 신속한 결혼 선언을 묵묵히 받아들이는 것 말곤 없었어. (244쪽)


아나는 유약하고 순진한 소녀였다. 주변의 종용에 어쩔 수 없이 투렐이라는 프랑스인과 결혼하게 되고 그렇게 그녀의 시련은 시작되었다. 투렐은 귀족으로 신분을 감쪽 같이 속이고 아나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그는 사실 도둑질에다 살인까지 저지른 잔인한 범죄자였다. 아나는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다. 그날 밤 아나는 임신한 몸으로 하녀 아망테와 함께 투렐의 성에서 도망친다. 남편에게 잡히지 않기 위해 썩은 호두 껍데기로 금발과 얼굴을 검게 물들였고, 결국 아나는 회색 여인이 되었다. 생기를 잃고 평생을 공포 속에서 사는 가련한 여인이 되어버렸다.


아나의 비극적인 결혼의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은 사실상 그의 아버지나 오빠가 아니라 올케인 바베케와 친구 어머니인 마담 루프레히트다. 우선 바베케는 아나와 함께 동네에서 미인으로 소문이 자자하던 여자였다. 바베케는 아무래도 아나를 많이 시기했던 모양이다. 시집오자마자 그녀는 아나를 그 집에서 밀어내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한다. 가령 아나에게 관심을 보이는 남자를 부추겨 그녀에게 접근하도록 하는 식이다. 순진하고 유약했던 아나는 그런 상황이 지독히도 곤란하고 불편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녀는 멀리 카를스루에에 있는 친구 조피의 초대에 내키지 않아 하면서도 응하고 말았다. 그리고 거기서 투렐을 만난다.


투렐과의 만남은 마담 루프레히트의 적극적인 주선으로 약혼을 거쳐 결혼으로까지 이어졌다. 마담 루프레히트는 사교계에서 지위를 유지하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는 허영 많은 여인이다. 독일인이면서도 프랑스를 동경하여 '프라우'라는 호칭 대신 '마담'으로 불리길 원했다. 그녀는 아나의 모든 행동들이 사교계의 예의범절에 적합하도록 교정을 요구하고 사사건건 간섭했다. 그리고 결국 아나의 입장과는 관계없이 투렐의 많은 재산과 높은 지위가 아나에게 더할 나위 없다고 판단하여 결혼을 추진했다. 그녀의 결정은 아나로 하여금 투렐과의 결혼을 파기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리고 바베케는 이 결혼이 일사천리로 진행되도록 물심양면으로 조력했다. 이렇게 두 여인의 협력으로 아나는 투렐과 돌이킬 수 없는 결혼을 하게 되었다. 질투에 눈먼 여자와 허영심 많은 여자가 한 순진한 소녀를 나락으로 몰아넣었다.


그런 한편 아나의 곁에는 또 다른 여자가 있었다. 노르망디 출신의 하녀인 아망테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나의 옆을 지켰다. 함께 도망치고 남장까지 하며 목숨을 걸고 아나를 투렐로부터 보호했다. 아망테의 용기와 투지가 없었다면 아나는 생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끝내 아나로 인해 목숨을 잃고만 아망테는 아나의 유일한 의지처였다.


바베케와 마담 루프레히트를 보자면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시쳇말은 맞는 것도 같다. 이 둘을 보고 있자면 투렐보다 더 악랄하고 교활하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망테를 보자면 그 말은 틀렸다. 수렁에 빠진 여자를 구하는 것 또한 여자인 것이다.


엘리자베스 개스켈은 이 짧은 소설 속에서 아주 약한 여자를 주인공으로 두고 교활하고 허영심 많은 여자와 독립적이고 강인한 여자 모두를 보여주었다. 소설 속 서스펜스는 이 여자들 속에서 그려지기 때문에 더욱 서늘하다. 악마 같은 남편 투렐보다 사실 바베케와 마담 루프레히트의 악의 없는 얼굴이 더 무섭게 다가온다. 그녀들은 진심으로 아나가 투렐과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꾸리길 바라는 마음에서 그렇게 했다. 두 여자 모두 투렐의 많은 돈과 높은 지위를 보고서 그것으로 아나가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 낙관했다. 이 안일한 낙관이 결과적으로 한 소녀를 회색 여인으로 만들었다. 


그럼에도 아나는 살아남았고 딸까지 무사히 출산했다. 이는 모두 아망테 덕분이다. 아나를 향한 아낌없는 애정과 돌봄이 아나의 생존을 가능케 했다. 독립적으로 생계를 꾸리고 투렐에게 기죽지 않는 유일한 인물인 아망테는 수동적인 역할에서 벗어나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여성의 모습을 시사한다. 비록 아망테는 죽었지만 아나는 살아남아 그녀를 기억한다. 그녀가 변장을 위해 아나에게 칠해 준 잿빛 속에서 말이다. 그래서 회색은 슬프지만 강한 색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가부장제의 폭력 속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여자의 색이면서 동시에 그녀를 도와주었던 여자가 칠해준 색이기도 하다. 아나가 입은 회색 속에는 폭력과 사랑이 공존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