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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서처럼 쓴 독서감상문을 위하여

업무가 생활이 되어버린 우리들에게

by 꽃에서 꽃이 핀다

함께 일하는 동료가 독서 모임에 갔더랬다. 책 한 권을 읽고 각자 감상문을 써서 돌려 읽은 뒤 토론하는 방식이었는데, 내 동료가 쓴 글을 보고 누군가 그러더란다. "기획서처럼 쓰셨네요?" 동료는 그 말이 그렇게 기분이 나빴다고 했다. 화를 낼 만큼은 아니지만 어쩐지 불쾌하더라고. "기획서 밖에 못 쓴다는 얘기잖아, 그거." 동료가 투덜댔다. 그렇게 업무용 글쓰기 습관이 몸에 밴 줄 자신도 몰랐다고 했다. 스스로 그렇게밖에 글을 못 쓴다는 사실이 당황스러웠다고 했다.


동료는 당황했지만, 나는 황당했다. 애초에 그 말을 했다는 상대방이 나쁜 의도로 말을 꺼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말한 이의 의도가 어떻든 간에 기획서 쓰는 사람이 기획서처럼 글을 쓴 것이 뭐가 문제인가? 사진작가가 가족 모임에서 작가처럼 사진을 찍었다고 비난받을 이유가 없고, 요리사가 친구 모임에서 집밥처럼 넉넉한 요리를 만들지 않았다고 핀잔 들을 이유가 없다. 글의 목적에 맞는 형식이 반드시 하나로 규격화 되어 있지 않다면야.


언젠가 회사 선배가 지인의 책이라면서 어느 광고 카피라이터의 책을 권했다. 읽는 내내 나는 약간의 불편감을 느꼈는데, 그 이유를 생각해 보니 작가가 내내 '광고 카피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글쓰기'라는 관점을 내비치고 있기 때문이었다. 광고 카피에는 힘이 있다. 뛰어난 카피는 그대로 촌철살인이며, 가끔 한 권의 책 보다 깊은 생각과 여운을 전한다. 잘 쓴 카피는 수 만, 수 백만의 사람을 움직인다. 연설문보다 강하고 시보다 부드럽다. 그런 카피들이 분명히 있다.

그러나 그것이 카피만이 위대한 글쓰기라는 근거는 될 수 없다. 위대한 글은 오히려 형식이나 쓰임에 구애받지 않는다. 나는 마르케스의 《백 년 동안의 고독》을 읽고 삼일 내내 울었는데, 아직까지 나를 그렇게 오랫동안 울게 한 카피는 없었다. 하지만 SK텔레콤의 "사람을 향합니다" 같은 카피는 십 수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울림이 있으며 에이스침대의 "침대는 가구가 아닙니다. 과학입니다'는 인생의 가르침은 들어있지 않을지언정 여전히 명 카피다. 광고 카피인가 아닌가가 아니라, 그 글이 그 쓰인 목적을 얼마나 달성했는가가 글의 품질을 정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때로 효율적인 업무 방식을 배우기 위해 목적에 최적화된 글의 형식을 익혀야 할지도 모른다. 기획서다운 기획서, 독서 감상문다운 감상문, 시다운 시, 소설 다운 소설. 하지만 독자나 오히려 형식을 따지지 않는다. 대다수의 독자는 기본적으로, 형식과 상관없이 타인의 이야기에 공감할 수 능력을 품고 있으며, 카피든 소설이든 공감이 발동되는 순간 눈물을 쏟아낼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엄마' 한 마디도 울컥하고, '음...' 같은 감탄사도 긴장을 유발하며, 심지어 '...'와 같은 침묵의 표시도 마음을 처연하게 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형식이란, 어쨌거나 공감이라는 본질로 가는 수많은 경로 중 하나일 뿐이다.


새 PT를 준비하면서 다양한 제작안과 카피가 나왔다. 제작팀은 모든 안에 혼신을 다 했겠지만 결국 공통적으로 다른 부서의 사람들까지 울린 안은 '어머니'의 에피소드가 포함된 안이었다. 카피에 따라 밋밋한 '어머니 광고'도 있겠지만, 대개의 어머니 광고는 어머니의 일상적 헌신을 다루기만 해도 눈물을 자아낸다. 이처럼 문장으로 구조화되지 않아도 이미 공통된 경험을 내포한 어휘가 많다. 글쓰기는 재료의 힘이 유난히 강한 분야다. 형식이 글의 퀄리티를 만드는 중요한 요소임은 사실이나, 결코 글의 전부가 될 수 없는 이유다. 공감을 이끌어낼 수만 있다면, 내 글쓰기 형식에서 굳이 자격지심을 느낄 필요는 없다.


다시 기획서 같은 독서감상문을 쓴 동료의 이야기로 돌아와 본다. 그는 여전히 성실하게 업무를 수행하며 모든 기획서가 그렇듯, 백 퍼센트는 아니지만 때때로 클라이언트의 마음을 사는 기획서를 쓴다.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그가 쓴 '기획서 같은 독서감상문'은 누군가에게 일반적인 독서감상문보다 그 책을 읽어봐야 할 이유를 전달하는데 효과적이었을지도 모른다. 독서란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는 행위다. 그런 행위의 끝에 다른 사람들과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였다면 그의 독특한 감상문은 또 하나의 다양성으로 재미를 더해주지 않았을까?


이렇게 말해도 일할 때는 기획서의 형식도 강조하는데, 어디까지나 기획서 쓰기 역량 훈련 차원이다. 만약 나 자신의 브랜드를 위해 직접 기획서를 써야 할 일이 생긴다면, 편지처럼 쓰고 싶다. 겸손하지만 당당하고, 생소하지만 마음을 당기는 그런 편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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