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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착 바지처럼 꼭 맞는 사람들

마음의 군살을 빼면 입을 수 있었던 인연들에 대해

by 꽃에서 꽃이 핀다

사고마비의 계절이다. 내가 방금 지은 말인데, 생각이 마비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나이가 사십 하고도 높은 숫자가 되니 부쩍 살이 찐다는 뜻이다. 소위 나잇살이다. 먹고 생활하는 패턴은 별로 달라지지 않는데 요새 부쩍 몸무게가 불었다.

주로 둔부에 집중적으로 살이 찌기 때문에 몸무게가 조금만 늘어도 먼저 바지 사이즈가 안 맞는다. 오늘도 그랬다. 지난달까지 그나마 들어가던 바지가 입을 때마다 작아지는 듯싶더니 결국 지퍼 올리기가 버겁게 되었다. 다른 바지라 필요한데 그나마 사이즈가 넉넉한 바지들은 하필 축축한 채로 빨랫줄에 걸려 있다. 출근시간이 임박했는데 작은 바지와 젖은 바지 사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별스런 진퇴양난이다.


절박한 심정으로 평소 잘 열지 않는 옷장을 뒤졌다. 가진 옷이 뻔한 지라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웬걸, 서랍장 바닥에서 통 큰 바지가 세 벌이나 나왔다. 대체 어디서 솟아난 바지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아하. 언젠가 온라인에서 구입했는데 택배로 받아 보니 다소 커서 입지 못 했던, 반품도 못 해서 옷장에 넣어두었던 바지들이다. 몇 년 전의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는데 오늘의 나에게는 맞춤옷처럼 잘 어울린다. 나는 세 벌 중 한 벌을 골라 입었다.


한 때 절대 못 입을 것 같았던 바지를 입고 하루를 보내는데 서랍에 넣어둔 긴 시간이 미안할 만큼 바지가 편하다. 바지가 서랍 안에서 잘 숙성되어서도 아니고 바지가 제 역할을 잘해보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어서도 아니다. 달라진 건 나다. 내 몸이다.


그런 마음으로 보니 하루 중 만나는 사람들에게도 여러 생각이 든다. 지금은 꼭 맞춘 듯 마음이 맞아도 나중에는 불편한 사람이 있겠고 오늘 어쩐지 잘 통하지 않는 사람도 언젠가의 나에게 마음 편한 사람으로 새 어울림을 찾을 수도 있겠구나. 물론 바지처럼 그대로인 사람은 없지만, 그 사람의 본질은 크게 바뀌지 않았는데 나에게 다른 존재가 될 수 있다. 내 마음이 지금 살쪄 있는가, 메마른 상태인가에 따라 같은 사람이라도 어울림이 달라진다. 그러니 단지 취향 때문에 한 사람과의 관계를 속단하기는 어렵다.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나의 작은 새'에는 두 주연이 등장하는데, 같은 독자라도 스물에 읽을 때와 서른에 읽을 때 마음속으로 두 주연 중 누구 편을 드느냐가 완전히 달라진다고 한다. 둘 사이에는 절대적 선악의 다름이 존재하지 않고 입장의 다름만이 존재한다. 많은 사람 관계가 이러하다. 대단히 악하지도, 천사처럼 선하지도 않은 수많은 사람들은 언제 어떻게 만나 어울려질지 모르는 상태로 산발되어 있다. 그래서 누군가와의 관계는 마치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살아 있는 동시에 죽어 있는 않은 중첩 상태다.


출근할 때는 몰랐는데 오후에 다시 보니 사이즈는 맞는데 스타일이 다소 옛날 식이다. 아하. 어떤 인연은 서로 만나기에 가장 좋은 시간, 굿타이밍이 있겠구나. 일상에서 무심코 지나치지 않고 누군가에게 조금 더 마음을 열었다면 어울림을 찾아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흘려보낸 인연들이 서랍 속 바지처럼, 헌 옷 수거함 영원히 놓쳐버린 인연처럼 지난 시간에 차곡차곡 쌓여 있는 장면이 보였다. 물론 그 시간으로 다시 돌아가도 나는 그들을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의 나는 지금보다 메말랐으니까.


그래도 나에게 맞지 않는다고 버려두고 잊어버린 사람들을 다시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쑥스러우니, 오늘은 일단 옷장이나 더 뒤져봐야겠다.


202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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