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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향인의 내향적인 화풀이

핑크 염색약이 까만 머리에 끼치는 영향

by 꽃에서 꽃이 핀다

경쟁 PT에서 또 떨어졌다. 팀에는 훌훌 털어버리고 다음 도전을 잘해보자고 말했다. 나는 벌써 아무렇지 않다고도 했다. 그런데 아무렇지 않지가 않았다. 배가 아프고 피로감이 몰려왔다. 집에 오는 길에 염색약을 샀다. 나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셀프 염색을 한다. 울거나 화내지는 못하고 스스로라도 원망해서 분을 풀고 싶은데, 머리카락을 못살게 구는 일이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일종의 자기 학대다.

이럴 때 누군가는 술을 마시고 누군가는 담배를 피우겠지만 술은 취할 만큼 많이 마시지 못하고 담배는 오래전에 끊었다. 친구를 만나 위안을 찾는 사람도 있겠지만 다른 이에게 감정을 털어놓으면 너무 속을 다 보였다는 사실에 또 스트레스를 받는다. 내성적인 사람에게는 자기 완결적인 화풀이가 필요하다. 내 경우에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 주지 않는 화풀이가 바로 염색이다.


한동안 MBTI라는 성격 진단이 유행했다. 그런 데 관심 없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타인에 대한 공감은 약하고 사실을 중시하는 사람들에게 "너 T야?"라고 한다든지 매우 외향적인 성격의 사람을 '대문자 E'라고 한다든지 하며 다양한 밈이 만들어졌다. 그래서 내향인이니 외향인이니, 회사에서도 서로의 성격에 대한 대화가 많이 오갔다. 예를 들면 소위 E성향, 즉 외향적인 사람들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에너지를 얻는 반면 내향인으로 불리는 I성향의 사람들은 혼자 있을 때 에너지가 채워진다든지 하는 이야기다.


그런 대화 속에서 나는 외향적 성격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기분일지 종종 생각해보곤 했다. 바닥으로 곤두박질쳐진 기분이나 마음속 어두운 구석으로 숨어버린 열정 같은 감정들을 타인으로부터 위로받음으로써 충전할 수 있다면 어떨까 하고. 내향인은 말하자면, 자가 충전만으로 채워지는 사람들이다. 타인의 친절한 위로는 고맙지만 내향인들의 부끄러움을 자극하기 때문에, 위로받은 만큼 또 에너지가 빠져나간다.


감정을 다스리는 일은 평생 숙제다. 나이가 들수록 저절로 되면 좋겠지만 팔순의 노인도 부부싸움을 하고 친구와 절교한다. 버려짐이 주는 슬픔 익숙해지는 사람은 좀처럼 없으며 실패가 낳는 좌절감에서 아무렇지 않게 걸어 나오는 사람도 없다. 이미 수십 수백 번의 실패를 경험했지만 늘 분하고, 자신을 의심하고 미워하게 된다.


염색약은 핑크색으로 샀다. 오늘의 스트레스는 브라운으로는 해결이 안 된다. 튀는 컬러일수록 내 머리카락을 더 괴롭힌 기분이 들고, 그럼 분이 더 풀린다. 머리가 원체 검어서 금발로 염색해도 진짜 금발이 되진 않는다. 먼저 탈색을 하지 않는 한 분홍이든 파랑이든 내 머리 위에서는 다 갈색이 된다. 그러니까 핑크는, 일종의 의식이다. 술로 치면 원샷이고, 담배로 비유하면 필터에 닿을 만큼 깊게 빨아들이는 일이다. 다음날 원래대로 돌아갈 일이고, 그래서 처음부터 다시 살아가야 하는 일이다.


주말이 지나고 핑크 아닌 핑크 염색 머리로 출근했는데 역시 아무도 알아봐 주지 않았다. 내향인인 나는 안심했다. 다들 주말 사이 지난 패배의 우울감을 털고 나와주었다. 누군가는 강변을 달리고 누구는 맛있는 음식을 실컷 먹고 또 친구를 만나 헤헤 웃으며 이겨내었을 터였다. 반가웠고 안쓰러웠고 고마웠다. 함께 이기고 진 사람들에게는 이런 마음이 든다.


내향인은 자가 동력으로 다시 일어선다. 하지만 알고 보면 이렇게, 말없이 사람들로부터 충전받는다. 주변의 웃음과 따뜻한 대화로, 성실함과 긍정적인 태도로 나 같은 사람은 다시 채워지고 굴러간다. 핑크 머리는 아니지만, 핑크빛으로 따뜻하게 채워진 마음으로.


2024.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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