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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 전략이라는 이름의 착취

타인을 먹고 살아가는 사람들

by 꽃에서 꽃이 핀다

교수 출신 조직장이 있었다.

업계의 구루로 불렸다.


당시 우리 팀은 선행 UX 개발 프로젝트가 한창이었다. 아직 상용화되지 않았지만 몇 년 이내 새로운 인풋(input) 방식으로 자리 잡을 수 있는 휴대전화 컨트롤 방식을 개발하는 일이었다. 우리가 개발한 방식이 모바일 디바이스 인풋 방식의 미래가 될 것이라는 설명을 위해 '인풋 방식의 진화도'를 그려냈다. 최초부터 현재의 방식까지, 그리고 궁극적으로 최종단계로 진화할 방식까지 흐름을 기술했다.


그때는 회사에서 반기 별로 팀마다 선행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우수작을 낸 팀은 포상을 받고 실제 제품 개발로 이어졌다. 그래서 경영진 사전 보고 없이 팀별로 프로토타입까지 진행하고, 결과물이 나오면 경영진 보고를 하는 오디션 방식으로 진행됐다.


그래서 조직장이 우리 팀 보고서를 보게 된 것은, 발표 당일이 처음이었다. 처음으로 보고하는 내용, 아무런 상부의 참여도 지시도 없이 순수하게 팀에서 만들어 온 내용, 실무와 병행하느라 잠을 아끼고 밥시간을 아껴 만들어 간 보고서.


"다가오는 00 학회에서 내가 이 내용 발표해도 되겠지?"


허락을 묻는 질문은 아니었다. 직위를 이용한 통보였다. 당시 겨우 주임연구원이었던 나는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내 침묵은 길지 않았다. 조직장이 답변을 기다리지 않고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물론 00 전자라고 회사 이름 쓸게. 00 전자에서 개발한 거라고 말이야."


집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쓴 보고서였다. 언젠가 논문으로 써보려 했던 주제였다. 내 발견에 내가 흥분해서, 피곤한 줄 모르고 작성한 내용이었다. 그런데 나는 힘없이 대답하고 있었다. 나는 주임연구원이었다. 그는 부사장이었다.


"네."


가끔 생각나는 에피소드다. 그런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볼 때, 그런 방식으로 성과를 쌓아하는 사람들을 볼 때 생각난다. 문득 답답해질 때가 있다. 나는 왜 그때 용기가 없었을까. 문득 불편해질 때가 있다. 지금도 많은 조직에서 누군가 이런 일들을 겪고 있지 않을까.


안타깝다. 힘내시라. 가능하면 '아니요'라고 말하시라. 쉽지 않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부디 의욕을 잃지 마시길. 세상에는 좋은 상사, 좋은 동료도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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