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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하고 홀리스틱한 브랜드들의 세상

판타스틱한 아이디어가 없을 때 잉글리시 드롭하는 트렌드에 대해서

by 꽃에서 꽃이 핀다

다음은 며칠 전 한 브랜드에서 받은 알림 문자다. 원문에 한글로 기재된 표현이라도 영단어인 경우에는 알파벳으로 바꿔 적었다. 또, 브랜드명 노출을 피하기 위해 ABCD company로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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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CD company에서 용어변경 고지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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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알림 내용 중 한영 단어 비율을 Chat GPT로 계산하면 띄어쓰기 기준으로 한글 53%, 영어 47% 정도다. 문자 그대로 '한글 반, 영어 반'이다. 어쩌다 이런 문장이 만들어졌을까?


우선 영어 어원을 가진 외래어가 계속 추가되고 한영 혼용이 일반화된 영향이 크다. 영화 제목을 의역하지 않고 영어 발음 그대로 한글로만 표기하는 트렌드도 계속된다. (최근 상영 중인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나 작년에 화제가 되었던 '서브스턴스' 같은 제목이 그런 사례)


거기에 더하여 브랜딩의 골치 아픈 문제가 숨겨져 있다. '함축성'의 난제다.


취급 상품이 다양해지고 서비스가 복잡해지고 브랜드 우열 경쟁이 과열되면서 브랜드에 함축적으로 표현해야 하는 내용이 비대해진 것이다. 예를 들어 주방 가전을 만들던 회사가 공기청정기를 새로 만들기 시작하면, 더 이상 우리 브랜드를 주방 가전으로 정의할 수 없다. 청정가전이든, 건강가전이든, 종합가전이든 새로운 표현을 찾아야 한다. 그러다가 공기청정기에 탑재된 센서를 이용하여 가정 내 공기 질을 측정하고 분석하는 앱을 만들면? 추가해서 그 앱에 건강 관련 콘텐츠를 연재하게 된다면? 그런데 그런 무형의 콘텐츠들이 소비자들에게 나름 먹히기 시작하면, 브랜드 담당자나 대표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 '단순히 가전브랜드라고 부르기에는... 우리가 하는 일은 너무나도 통합적이고 총체적이잖아?'라고. 그러면 더 이상 이전의 브랜드 정의에는 만족할 수 없고, 브랜드의 설명이 점점 길고 복잡해진다.


그리고 우리말로 다 담기 어려워지면 '결국 함축적인 영단어'에서 해결책을 찾아본다. holistic이라든지 life-changing 같은 거창하면서 세계의 모든 브랜드를 담을 만한 용어로 브랜드를 장식한다. 그리고 결국 소비자 조사에서 '뭐 하는 브랜드인지 모르겠다'라는 피드백을 받고, 그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 이런저런 설명을 추가하다가 '홀리스틱하고 라이프체인징하는 가전 이상의 가전'처럼 수습할 수 없는 브랜드 태그라인을 갖게 된다.


이는 영단어 전반이 우리말 단어보다 함축적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위 사례에서처럼 Wellness 같은 영어 신조어는 우리말 한 단어로 대체하기 어렵다. (Wellness : 웰빙(Well-being)과 건강을 뜻하는 피트니스(Fitness)의 합성어로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건강의 균형 잡힌 상태 및 이를 추구하는 전반적인 활동을 일컬음, 출처는 네이버 사전) 건강 또는 건강함이라고 해도 다 표현이 되지 않기 때문에 결국 한글로 웰니스라고 표현하는데 그친다. 심지어 일부 브랜드에서는 영문 그대로 Wellness라고 쓴다. 우리나라의 교육 수준이 높은 것은 사실이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Wellness의 의미를 정확히 알고 있는지 궁금하다.


브랜딩에서 영어를 쓰는 이유는 이 외에도 어감을 살리기 위해, 트렌디해 보이기 위해, 해외 브랜드처럼 보이기 위해, 해외의 문화적 영향을 받은 브랜드임을 나타내기 위해서 등 다양하다. 어떤 경우에는 영어 표현이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더 명확하게 전달할 수 있다. 그러나 단지 우리말로 좋은 표현이 나오지 않아서, 브랜드의 아이덴티티를 무분별하게 확대해서 영어가 필요하진 거라면, 본질적으로는 영어로도 문제 해결이 되지 않는다. 멋지게 영문으로 표현된 브랜드 슬로건에 몇 번이고 노출되어도 소비자는 무슨 브랜드인지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smart라는 표현을 지양한다. IT와 전자 업계에서 기술의 뛰어남과 사용 편의성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기 적절하기 때문에 IT와 전자 업계에서 많이 쓰던 단어다. 기존에 사용되지 않았던 새롭고 감각적인 단어로서 smart가 의미 있던 시점은 2000년대 초반까지였다고 생각한다. 지금 브랜드에 smart라는 단어를 쓴다면 소비자들은 아무 감동도 받지 못하고 어떤 브랜드인지 아이덴티티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특히 기술도 기능도 사용성도 기타 등등도 다 좋다는 의미를 욱여넣으려고 이 단어를 선택하지는 않았으면 한다. 그렇게 전달되지도 않을뿐더러 브랜딩에 있어 고민이 깊지 않아 보인다. (물론 브랜드명 자체가 원래부터 이 단어를 포함하고 있는 경우는 예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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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예시 브랜드의 메시지를 평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브랜딩에 얼마나 영어가 많이 쓰이는지 깨달을 계기가 되어 예로 들었습니다. 브랜드는 만족스럽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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