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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의 뜻으로 베이글을 내밀면, 사과일까 베이글일까

사과향만 살짝 묻힌 가식적인 베이글에 대하여

by 꽃에서 꽃이 핀다

'사과의 뜻으로 사과를 줄게'라는 옛날 유머가 있다. 미안한 마음에 잔망을 한 스푼 담아,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좋은 마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풀어줄 농담. 아주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면 그러려니 넘겨질 그런 사과의 표현. 가끔 이런 '어물쩍 사과'도 통할 수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라면.


하지만 기업과 사람 또는 기업과 사회의 관계에서라면 어떨까? 어물쩍 넘어가는 사과도 괜찮을까?


기업의 사과는 리스크 매니지먼트의 영역이다. 기업의 직간접 실수로 직원, 소비자, 사회에 악영향을 끼쳤을 때 사과를 한다. 법적인 강제성이 없는 경우에도 사과라는 활동은 브랜드 관리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사과가 필요한 상황이 되면 브랜드 이미지에 타격이 불가피하므로, 전략적인 대응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전략적 접근이라고 해서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을지, 약사 빠르게 머리를 굴려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많은 이론과 도서에서 기업 사과의 정석으로 '신속함'과 '진정성'을 꼽는다. 사과를 할 일이 있으면 지체하지 말고 잘못을 인정할 것, 그리고 진심으로 이 문제를 바로잡고 싶다는 의지를 말과 행동으로 보여줄 것. 한 마디로 '어물쩍' 넘어가려 하지 말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이라면 누구든 자신이 잘못을 하면 어물쩍 넘어가고 싶은 마음이 인지상정으로 피어오른다. 기업은 사람이 아니지만, 그 운영자석이 사람으로 채워져 있으므로 이런 마음이 나타난다. 가급적 책임소지가 불분명한 표현으로, 사과문은 자사 홈페이지에만 게시, 다른 사회적 이슈에 묻힐 수 있다면 차라리 침묵으로 버티기 등의 전략을 짠다. 그렇게 석고대죄하지 않고 넘어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는데 전문가가 동원된다. 교과서에 적힌 '신속함'과 '진정성'을 정답으로 삼는 기업이 사실 얼마나 될까 싶다.


이번 모 베이커리 브랜드의 26세 노동자 과로사 사건만 봐도 그렇다. 처음에는 사과 아닌 침묵으로 어물쩍 넘어가려 하더니 사건이 이슈화된 다음에도 과로사 여부는 따져봐야 한다는, 사과문이 되다 만 글을 올렸다. 겉모습은 사과인데 쪼개보니 사과 아닌 베이글 같은 입장 표명도 마지못해 올린 것처럼 보인다. 7월에 사망한 젊은 고인의 사연은 그렇게 10월 말이 되어서야 세상에 알려졌다. 그리고 국민들의 분노가 무색하게 '유족과 합의'라는 문구를 내세우며 여론을 침묵시키려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베이글은 팔렸고, 매장 앞 대기 고객 수를 세어보며 이 정도로 마무리될 수 있겠다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신속도 진정성도 없이.


많은 언론과 업계 경력자들이 지적하다시피, 이번 사건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이 브랜드에 쏟아지고 있는 의혹은 장시간 노동뿐 아니라 단기 계약 체결 및 수시 갱신, 최근 3년간 수십 건의 산업 재해 승인, 퇴직금 미지급 소송 등으로 이어진다. 죽지만 않았을 뿐, 소중한 시간과 열정, 건강을 갈아 넣었을 수많은 살아 있는 피해자들에 대한 사과는 아직도 '어물쩍 전략' 속에 갇혀 있는 모양이다. 게다가 아무것도 모른 채 누군가의 피눈물에 젖은 빵을 사 먹으며 '어물쩍 악인'들의 주머니를 채워주었던 소비자들은, 본의 아닌 죄책감과 슬픔을 떠안고도 아무런 사과를 받지 못했다.


가장 큰 문제는 앞으로도 어물쩍 넘어가질 수많은 예상 피해들이다. 이런 태도의 브랜드가 쉽게 달라지리라 기대할 수 없기에, 고인에 대한 안타까움을 넘어 나는 앞으로도 빵재벌들에게 착취당할 예비 피해자들이 너무 걱정된다. 브랜드의 법 위반 정황을 확인한 노동부에서 전 지점, 전 계열사로 감독 대상을 확대한다고 하니 법 위반 사실은 확실히 책임을 지게 하고 재해는 철저하게 예방하길 바란다. 감독기관마저 어물쩍 넘어간다면 베이글을 먹는 것조차 죄스러울 것 같다.


(2025.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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