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reaming Beans
KLM에 일하면서 한국회사와 구별되는 특유의 문화차이가 뭐냐고 한다면 바로 더치 크루들의 직설적인 화법이겠다. 한국과 달리 시니어리티가 드물고 크루들도 서로 동등한 위치에서 일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러한 직설적임이 더 도드라지게 느껴지는 거 같다. 전반적으로 더치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있는 대로 솔직하게 숨김없이 표현하고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이야기한다. 마치 우리나라의 빨리빨리 문화처럼 이러한 직설적인 면은 더치문화의 논할 때 빠질 수 없다.
특히 개인적으로 그들이 서론을 생략하고 본론을 바로 말할 때 가장 당황스럽다. 축구경기로 비유하자면 경기 중에 한 더치 공격수가 날카롭게 정확히 나를 향해 직선방향으로 갑자기 공을 패스했는데 정작 수비수인 나는 '얘가 이걸 왜 갑자기 나한테?'라며 당황스러운 느낌이랄까.
이러한 직설적인 의사소통방식은 오히려 효율적일 수 있다. 마치 축구 선수들이 포지션에 상관없이 깔끔하게 패스를 주고받으며 물 흐르듯 경기를 펼쳐나가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고 보니 네덜란드는 공격과 수비 포지션에 구애받지 않고 멀티 포지션을 추구하는 '토털사커'로 유명하다.) 역설적이게도 그들의 직설적인 어투와 말에서 다이아몬드 원석처럼 가공되지 않은 따뜻한 마음을 발견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래도 한국인의 상식에서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격식이 없어서 가끔은 장소나 상황에 따라 서로 간의 예의를 차리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그런 면에서 상대를 배려하는 한국어가 빛을 발할 때가 있다.
어떻게 말해야 서로 마음이 상하지 않게
대화를 할 수 있을까?
듣는 사람에 대한 배려 없이 직설적으로 말하는 그들의 의사소통방식은 투박하긴 하지만 일하다 보면 이들은 좀처럼 빈말은 하지 않으며 상대방의 말 그대로 받아들이는 단순한 면이 있음를 알게된다. 그래서 오히려 에둘러 말하면 불필요한 오해가 생길 수 있으니 그때그때 솔직하게 말하는 편이 낫다. 홧김에 하는 말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상대방이 화가 나서 심하게 한 말도 나중에 홧김에 했던 말이라고 생각하며 넘기는 경우가 많지만 더치들은 그 사람이 심하게 했던 말 글자 그대로 받아들인다. 아무리 화가 나도 한번 뱉은 그 말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서로 다른 의사소통방식으로 일하다 보니 두 나라의 문화 차이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다리를 건너니 눈에 띄게 많은 갈매기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골목사이로 사람들이 소스가 담뿍 담긴 먹음직스러운 감자튀김을 손에 하나씩 들고 있다. 알고 보니 호시탐탐 사람들이 손에 들고 가는 감자튀김을 노리고 있었다. Screaming beans는 Fabel Friet(*감자튀김을 더치로 friet라고 한다) 하는 감자튀김 가게 근처에 위치하고 있다.
눈에 띄는 것은 'Guest Roaster'아래의 'Rose'라는 이름의 커피였다. 나중에 물어보니 스위스 출신의 로스터에게서 받은 커피빈이라고 하는데 그들도 자체적으로 로스팅을 하지만 이렇게 다른 로스팅 컴퍼니와 협업하여 커피를 판매한다고 한다. 파나마 커피도 궁금하기도 했고 인스타그램에서 커핑하고 있는 영상도 보고 온지라 주문해 보았다.
'Cupping(커핑)'은 커피의 전반적인 향미, 맛을 평가하는 것을 말한다. 커핑 컵에 신선하게 간 커피를 넣은 후 향을 맡고 평가한다면 뜨거운 물을 붓고 3분 정도 지난 후 부유물을 숟가락으로 깨트리며 향을 또 맡는다. 이때 맡은 향을 노트에 기록하고 또 일정시간이 지난 후 숟가락으로 커피를 한 스푼 마시는데 이때는 입안에 스프레이를 뿌리듯이 골고루 분사하도록 '츄르릅'하며 마시면 된다. ('Slurping'이라고도 한다.)
사실 처음에 커핑을 할 때 다른 사람은 다 느끼는 것을 나는 전혀 느끼지 못할 때 스트레스를 받곤 했다. 그런 경우는 나는 틀렸다고 생각하며 움츠려 들곤 했는데 왜 그랬나 모르겠다. 경험이 많은 커퍼(커피감별사)의 경우는 일반인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기에 다양한 맛과 향을 정확히 잡아내지만 그건 커피의 질을 판단하기 위한 무수한 작업으로 발달된 능력이다. 물론 그들이 적은 커핑노트가 맞지만 내가 그들처럼 정확하지 않아도 된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커핑은 직관적인 부분이 많이 차지하기에 틀려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커피를 많이 아는 것과 느끼는 것은 서로 다른 영역이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경험과 지식이 다 다르니 같은 커피라도 각각 다르게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틀렸나? 하며 움츠러들지만 않는다면
한잔의 커피로 얻는 경험은 무궁무진하다.
에스프레소와 드립커피가 도착했다. 에스프레소를 보니 황금빛 크레마가 찰랑거리는 게 엄청 부드러워 보였다. 냄새도 달콤하고 산미도 적당하지만 무엇보다 달달하고 오렌지 주스와 같은 스위트함이 있었다. 게다가 입안에서 커피를 머금으면 샤워 후 보디오일을 발랐을 때 물방울이 피부에 동글동글 맺혀서 흘러내리는 것처럼 부드러운 바디감이 있었다.
'Rose'는 커핑노트에 쓰인 그대로 느껴졌다. 자두와 바나나와 같은 과일의 산미가 느껴졌고 혀에서 찰랑찰랑 흔들리는 것이 샴푸광고에서 보는 머리카락처럼 입안에서 굴러가는 바디감이 있었다. 카페의 이름은 직설적인 더치스럽게 지은데다 해리포터에 나오는 맨드레이크가 떠오르는 'Screaming beans'이건만 이렇게 풀바디의 커피를 추구한다니 반전이다. 나중에 판매하고 있는 원두를 둘러보던 중 하나의 이름이 속삭이다는 뜻의 'Whisper'라는 원두를 보고 흥미롭다고 생각했는데 커핑노트를 보니 왠지 아까 마신 에스프레소와 이미지가 겹친다. 그래서 바리스타에게 에스프레소원두인 거 아니냐고 물어보니 맞다고 한다. 에티오피아와 콜롬비아산 원두로 워시드와 내추럴방식으로 가공된 3가지 원두가 3분의 1씩 각각 공평하게 담겨있다.
커피를 마시면서 바리스타가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나는 사실 카페에 가면 개인적으로 안 좋은 경험 때문에 커피머신을 중심으로 동선이 어떻게 되어 있으며 몇 명의 바리스타가 일하는지 주의 깊게 보는 편이다. 흥미롭게도 내가 만난 바리스타는 주문이 있으나 없으나 포터필터를 연신 닦고 있었다. 특히 포터필터를 소중히 닦으며 노래를 흥얼거리며 즐겁게 일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기분이 즐거워지고 포터필터를 몸에서 떨어뜨리지 않고 포터필터와 혼연일체가 되어 있는 그녀의 모습이 심상치 않다. 나도 저 자리에서 일한 적이 있지만 포터필터를 저렇게 많이 닦은 적은 없었는데 닦고 또 닦는 모습에 호기심이 생겼다.
이미 카페인은 한계치로 섭취했지만 그냥 돌아가기 아쉬웠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카페라테를 주문하고 기다렸다.
컵을 손에 대어보니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적당한 온도이다. 게다가 표면에서 느껴지는 질감이 정말 조약돌 마냥 반들반들하다. 한 모금 마셔보니 스팀우유가 정말 부드러운 크림처럼 폭신폭신하다. 스티밍을 어떻게 이렇게 꼼꼼하게 한 건지 촘촘하게 짜여진 우유폼이 느껴졌다. 역시 포터필터를 꼼꼼하게 닦을 때부터 알아봤다. 에스프레소 2샷이 들어갔음에도 전혀 진하지 않았고 우유의 단맛이 더 강조되었지만 나는 우유를 좋아해서 이러한 커피가 오히려 좋다. 한 모금 마시고 숨을 쉬면 코에서 우유냄새가 나오는데 창문밖 너머로 보이는 아기에게서 나는 냄새 같았다. 30분 넘게 우유폼이 무너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는 것을 보니 이 바리스타 혹시 우유로 실크를 만든 게 아닌가 싶었다.
암스테르담에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잠깐 구름이 걷힌 하늘에서 붉은 노을이 찰나의 순간 모습을 드러냈다. 석양에 물든 암스테르담은 마지막으로 사라져 가는 빛에 드리워져 은은히 빛이 나는 거 같다. 세찬 바람과 구름이 잔뜩 끼어 우울하고 까칠한 암스테드담의 하늘도 가끔은 이렇게 부드러운 빛을 마지막으로 비추며 작별인사를 할 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