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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모네이수 Feb 15. 2024

암스테르담의 숨은 안식처

Hummingbird Amsterdam


내가 머무는 호텔에서 지하철로 세 정거장만 정도 가면 Rokin이라고 하는 역에 도착한다. 이곳에 오면 암스테르담시내 주요한 관광장소의 웬만한 곳은 쉽게 갈 수 있다.


Rokin 역에서 바로 나오면 네덜란드 특유의 다양한 시기에 지어진 오래된 건물들이 맞이한다. 펄럭이는 네덜란드 국기와 함께 그 앞에 한 동상이 서있다. 평소에는 네덜란드를 구한 장군이려니 하고 넘겨짚었는데 오늘따라 웬일인지 눈이 자꾸 갔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이 동상의 주인공이 스커트를 입고 있는 데다 더 자세히 보니 여자였다. 누구일까 싶어 검색해 보니 네덜란드의 최초의 여왕  빌헬미나 (Wilhelmina) 여왕이었다. 세계 1차 2차 대전으로 힘든 시기를 겪은 네덜란드는 전쟁과 재건의 역사를 2명의 여왕과 함께 했다.


그래서 그런지 KLM에서 일하다 보면 양성평등에 대한 의식이 강하고 여자도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의식이 강한 거 같다. 물론 여성이 사회활동을 하기 위해서 과거 정부차원에서 많은 노력을 했고 많은 수의 여성들이 사회활동에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다. 물론 이게 여왕 때문 인건 아니겠지만 내 생각에는 힘든 시기를 함께 이겨낸 왕가의 수장이 여성들이었고 그러다 보니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동등한 위치에서 일할 수 있는 환경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다.


지금은 국왕은 빌럼 알렉산더르(Willem-Alexander) 국왕으로 이분은 딸만 셋인 딸부자이다. 그래서 아무래도 차기 국왕은 또 여왕이 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왕실업무 외에도 이분의 직업은 바로 KLM 부기장이다. 20년 넘게 승객들 몰래(?) KLM에서 부기장으로 한 달에 2번 정도 비행했다고 한다. 이처럼 소박하고 서민적인 행보를 보이기 때문에 국민들이 좋아하는 걸 수도 있겠다. 그의 생일인 킹즈데이에는 모든 사람들이 네덜란드 왕가를 상징하는 오렌지 옷을 입고 축제를 즐긴다. 사실 이날은 그의 생일은 아니고 빌럼 알렉산더르 국왕의 어머니의 생일이다. 빌럼 알렉산더르 국왕은 겨울생인데 겨울에 킹스데이로 지정하면 사람들이 추워서 그날을 즐기기 힘드니까 어머니의 생일인 4월 27일을 고수했다고 한다. 이런 면을 보면 권위나 원칙을 고수하기보단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네덜란드 왕실의 배려가 느껴진다.


하지만 완벽한 사람은 없다고 왕족이면서 취미로 파일럿을 하는 갓생을 살고 이지만 그도 큰 실수 해서 국민들에게 머리를 숙인 적이 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다들 여행을 자제하던 시기 빌럼 알렉산더르 국왕가 가족들이 방학을 맞아 개인 여객기로 그리스로 몰래 여행을 갔다고 한다. 그게 Flightcatcher에게 들켜서 그리스에 도착한 지 하루 만에 KLM을 타고 돌아와야 했다. 들은 바로는 돌아올 때는 국민들의 눈치 때문에 차마 개인 여객기로는 돌아올 수 없어서 KLM을 탔는데 그것도 겨우 좌석을 구해서 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바로 다음날 국왕의 대국민 사과가 이어졌다.


사과가 참 빠르다는 건 KLM에서 일하면서 더치동료들에게도 느끼는데 물론 전부는 아니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깨달으면 그 자리에서 재빨리 사과를 한다. 자신들의 의견을 꼬장꼬장하게 주장하는 면도 있지만 대화를 하면서 상대방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판단이 되면 정말 시원하고 빠르게 사과를 한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 게 아니고 벨기에 출신의 크루들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보다 빠른 사과 덕분에 막상 그 상황이 닥치니 무엇 때문에 불편했는지도 잊게 되고 어안 벙벙이 될 때도 있었다. 어설프게 변명하며 이래저래 빠져나가려고 하는 것보다 이렇게 확실히 사과하는 편이 더 합리적이다.



Hummingbird Amsterdam




관광객들로 가득 찬 담 광장과 쇼핑거리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스페셜티 카페이다. 카페에 들어가면 화려한새 그림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주문을 하려는데 메뉴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커다란 눈에 매력적인 바리스타가 무엇을 원하는지 친절하게 물어보며 적극적으로 도와준다.





여기는 메뉴가 없이 바리스타에게 개인적으로 주문하면 원하는 대로 만들어주는 콘셉트인 듯했다. 카페는 관광객보다는 근처 로컬들이 대부분이었다. 익숙한지 바리스타에게 커피를 부탁하는 데 주문도 많고 요구하는 것도 많다. 아침부터 노트북을 들고 일하는 사람도 있었고 출근은 했는데 시간이 남아서 잠시 여기에서 커피 한잔 하며 쉬다 갈려한다는 말이 들렸다. 월요일 아침에 이렇게 근처 카페에서 땡땡이를 치다니 뭐 하는 사람인가 궁금하다.



커피머신이 올려져 있는 테이블 하나는 모든 손님들에게 오픈되어 있었다. 계산하는 곳, 음료를 받는 곳이 따로 지정되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가운데를 중심으로 둥글게 자리가 잡혀있어서 바리스타가 있는 곳에서 손님들의 자리가 탁 트여있게 개방되어 있다. 뭔가 무질서하면서도 질서 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바리스타 언니들의 아름다운 외모가 빛을 발해서 그런지 그런 어수선함도 용서가 되는 느낌이다.



에스프레소를 마셔보니 이게 무슨 와인인지 커피인지 숙성된 레드와인의 풍미가 느껴졌다. 그레이프, 베리의 산미 자두의 스위트함에 은은한 꽃향까지 느낄 수 있었다. 와인이 거기서 왜 나와? 할 수 있지만 커피 품종과 블랜딩의 방식에 따라서 와인과 같은 바디감에 아로마가 나올 때가 있다. 여기는 그런 커피를 추구하는 거 같다. 같이 시킨 플랫화이트는 처음에는 뜨겁길래 약간 식혔고 나중에 한입 마셔 보니 와인에 우유를 섞은 맛인데 더 식으니까 웰치스 포도주스에 따뜻한 우유를 섞어놓은 거 같은 맛이었다.



이곳에는 어여쁜 2명의 바리스타 외에도 한 더치남자가 있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커피를 만들지 않는다. 대신 카페를 오는 손님들과 이야기를 하거나 핸드폰을 보고 있거나 둘 중에 하나이다. 사장님인 거 같긴 한데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바리스타는 아닌 거 같다.



어디선가 검은 개 한 마리가 홀연히 나타났다. 덩치는 엄청 큰데 조심스레 손님들 근처에 한 바퀴를 쭉 돌기 시작했다. 나도 용기를 내어 손을 내밀었는데 이 녀석이 내손을 발견하고 오더니 얼굴이나 주둥이가 아니라 별안간 뒤통수를 보여준다. 내 눈을 마주치지 않고 뒤통수를 들이대는 걸 보고 부끄럼이 많구나 싶었다.


주인인 듯한 더치남자는 손님들이랑 쉴 새 없이 떠드느라 바쁜데 얘는 성격이 반대인가 보다. 너도 나름 여기서 쉬고 있구나 싶었다. 이만하면 됐다 싶었는지 다시 느릿느릿 걸어가더니 바리스타들의 일하는 공간 구석으로 들어갔고 내가 갈때까지 나오질 않았다.


이 공간은 참 사교적이거나 외향적이지 않으면 버티기 힘든 곳 같다. 작은 공간이라 그런지 자꾸 눈이 마주치고 사람들이 빙그르 몸만 돌리면 그룹토론도  가능할 정도로 가깝다.


탁 트인 공간 가운데는 커피를 만드는 여인들 그리고 한편에는 손님들을 지켜보며 팔짱을 끼고 삐딱하게 앉아있는 더치남자. 점점 가게문을 열고 들어오는 로컬들을 알아보며 반갑게 맞이하는 거 보면 이곳은 그들의 익숙한 공간이자 사랑방인 듯하다. 떠들썩한 분위기에 조용한 사람은 나 혼자다. 매일매일 이런 식이라고 생각하니 그 개가 왜 저기 숨어있나 이해가 된다.





예전에는 여행을 하다가 이런 순간을 오면 외로움을 곧잘 느꼈다. 다들 친한 사람들이나 파트너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 나만 이곳에 남겨진 거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속해 있던 곳을 생각하고 더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고 싶었다.


그들의 표정, 말투, 억양 모든 게 낯설고 그들에게 나는 완벽한 이방인이다. 알아들을 순 없지만 표정과 분위기 그리고 목소리 톤으로 어떤 대화일지 상상해 본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들과 나는 같은 공간에  있지만 그들은 전혀 나에게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살짝 주눅 들었던 기분이 조금씩 누그러지며 가벼운 마음으로 그들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알아듣지 못하지만 그들의 대화를 엿들으며 내가 전혀 모르는 타인이지만 그들의 감정과 생각을 느낄 수 있을 거 같았다. 왠지 모르는 자유로움이 느껴졌다. 한참 그들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나에게 돌려 보았다. 조금씩 나도 나에게 들러붙어 있던 나의 여러 가지 생각이나 걱정을 타인의 시선으로 관찰하기 시작했다.








암스테르담은 언제나 북적인다. 면적 대비 인구율을 보자면 암스테르담의 밀집도는 상당히 높다고 한다. 게다가 수만 명의 관광객으로 정신없는 이 도시에서 살게 되면 이러한 작은 휴식처가 필요하다. 여러 개의 작은 섬이 거미줄처럼 퍼져있는 암스테르담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잠시 들려 숨을 고르고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공간말이다.


즐겁게 아무 생각 없이 친한 사람들과 재잘거릴 수 있고 내가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만들어 주며 친절한데 예쁘기까지 한 바리스타가 있는 곳.

비록 암스테르담을 스쳐 지나가는  이방인에게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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