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랑 Nov 20. 2023

글쓰기로의 도피

화성아이, 지구입양기





책장을 서성이며 무슨 책을 읽을까 이 책 저 책 전전하다가 로스쿨 선배한테 선물 받은 '화성 아이, 지구 입양기'라는 책을 펼쳐보았다. 이 선배는 사회복지학과 철학을 전공으로 하였는데 그중에서도 아동사회복지에 관심이 많으셨고 이 책이 그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라 하여 그 당시 아동심리가 매우 궁금했던 나에게 매우 흥미로웠던 기억이 있다. (지금에 와서 다시 읽어보니 그 당시에는 아이가 없어서 이만큼 이해할 수가 없었겠다 싶다.)

 






유명한 SF작가인 독신 게이 남성이 과잉행동장애에 부모에게 버려진 후 기관에서 두 차례 학대받았으며 여덟 번이나 기관을 옮긴 연장아동*인 데니스를 입양하면서 일어난 일들을 신기하게도 유쾌하게 풀어놨다.**(참고로 완전한 허구가 아닌 사실 베이스의 이야기이다.)


객관적으로도 힘든 아이를 유머를 담아 사랑을 주는 내용이라 아이 엄마로서 매우 흥미로웠지만,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사실 작가가 젊은 시절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글쓰기를 피난처로 삼았다는 그 부분이었다.

그는 '삶은 내가 잃어버린 것의 잔해'라며 괴로워하다가 글을 패배에 따른 철수지이자 안전한 도피처로 여기고 글 속으로 도망을 갔다. 그렇게 수도 없이 사랑에 대해 글을 쓰다가 결국 그는 깨닫는다. 글 속의 사랑은 결국은 글일 뿐 실제의 사랑은 아니었음을. 글 바깥 세상에도 여전히 자신은 사랑을 받을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자신도 사랑을 만들어 낼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마치 자신의 어릴 적 모습을 가지고 있던 데니스를 입양하기로 한 것이다.




지난번 읽은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에서도 비슷한 맥락의 부분이 있었다. 저자가 여러 가지 여행의 이유를 찾아 이야기를 건네는데 그 중 한가지로 누구나 잘 아는 '삼십육계 줄행랑'을 소개한다. 흔히들 생각하는 도망, 도피에 대한 부정적 생각과는 달리 그는 이를 훌륭한 계책 중 하나라고 소개한다.


“풀리지 않는 삶의 난제들과 맞서기도 해야겠지만, 가끔은 달아나는 것도 필요하다. 삼십육계의 마지막 패전계의 마지막 계책은 ‘주위상’으로 불리할 때는 달아나 후일을 도모하라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삼십육계 줄행랑’이라는 말이 여기서 온 것이다.

근대 이후로 인간은 자연과 세계를 개조하여 통제하며 발전해 왔고, 그런 정신을 이어받은 자기 계발서들은 우리에게 주변의 문제들은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고대의 지혜에 끌린다. 인생의 난제들이 포위하고 위협할 때면 언제나 달아났다. 이제 우리는 칼과 창을 든 적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다른 적, 나의 의지와 기력을 소모시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적과 대결한다. 때로는 내가 강하고 때로는 적이 강하다. 적의 세력이 나를 압도할 때는 이길 방법이 없다. 그럴 때는 삼십육계의 마지막 계책을 써야 한다.”



수 많은 여행의 이유 중(나는 삶의 이유로 받아들였다.) 바로 이 계책에 마음이 울렸던 것은 어쩌면 내가 삶을 바라보는 방식도 그래왔기 때문은 아닐까. 가끔은 삶에서, 고통받는 문제에서 삼십육계 줄행랑을 쳐왔던 것이다. 현실의 삶을 잠시 한 쪽 구석에 넣어둔 채 내가 만든 글쓰기의 세계로 줄행랑을 쳐왔던 것이다.


강박에서 영감을 받은 점과 반복을 모티브 삼아 작품세계를 완성해내는 쿠사마 야오이는 "전 결국 저의 심리적 문제들을 작품으로 표현하는 셈이에요."라고 말했다 한다.

그리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려야만 해서, 글을 쓰고 싶어서가 아니라 글을 써야만 해서 쓴다는 말에 적지 않은 깨달음이 있었다.


나는 그래서 늘 글쓰기를 갈망해 왔구나.

혼자서 만든 홈페이지에서, 싸이월드에서, 블로그에서, 인스타에서, 결국 이 브런치까지 옮겨와서는 끊임없이 나의 이야기를 하고 또 했던 건 아닐까.







* 연장아동 : 걷고 말하는 아이.

연장아동은 부모를 잃은 상실감과 충격을 모두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입양이 되어도 문제 행동을 많이 보이는 편으로, 연장아 입양의 경우 체계적인 교육이 별도로 필요하다.  



** 책 내용이 매우 흥미로워 간략히 줄거리를 소개해 보자면,

책 속에서 입양아 데이빗은 약물 남용 아버지와 알코올 중독자 어머니 아래 태어나 한 살 반때 버림받았고 8년간 여덟 보육시설에 옮겨 다니며 두 군데에서 학대를 받은 과잉행동장애 판정을 받은 '입양이 어려운 아이'였다. 그리고 자신이 '화성인'이라 주장하는 아이였다.

입양을 하면 안 된다고 점철되어 있는 서류들에 둘러싸여 이 행성 전체에 데니스를 원하는 사람은 자신 밖에 없다고 확신한 저자는, '우리가 논리만으로 산다면 위험을 무릅쓰는 일 같은 건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라며 데니스를 입양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가족을 구성하고 헌신하는 것은 일방적인 일이 아니므로 데니스가 먼저 입양을 원한다 말하기를 기다린다.

그런 과정에서 그는 아빠가 되고 싶은 사람에서 아빠가 될 사람이 되었고 아빠가 되는 법을 알아가다가 비로소 아빠가 되었다. 혹자는 게이에 독신 남성인 그가 아빠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의심을 품었겠지만, 그는 인간이 되려는 화성인에게 꼭 필요한 지구인 아빠가 되어 주었다.

하지만 화성인인 데니스가 지구에 정착하기까지 많은 고통이 있을 수밖에 없었고, 결국 '성간 우주선'을 부수는 사건이 벌어지는데 이로 인해 사랑으로 참아오던 저자는 패배를 선언하고 큰 폭발을 하고 만다. 이 과정에서 저자의 아픔과 그 회복, 그리고 사랑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믿으며 데니스를 만나게 된 사연이 나오고 그는 다시 극복을 하고 화성으로 떠나려던 데니스를 다시 지구에 무사히 정착시켰다는 이야기다. 



작가의 이전글 '책'이라는 말의 동의어는 어쩌면 '삶'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