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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일랑 Nov 14. 2023

'책'이라는 말의 동의어는 어쩌면 '삶'

여행의 이유




해외에서 외국인 노동자로 사는 남편은 아무래도 한국에서 일하는 분들보다 휴가가 현저히 많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금기시되어 있는 것이 아주 많은 곳. 거기다 날씨조차 1년 중 반은 야외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더우니 휴가만 생겼다 하면 이웃 나라들로 빈번히 도망 나가곤 했다.


북한으로 막혀있는 반도국가인 우리나라 같지 않게, 여기에서는 해외여행이라는 게 크게 거창하지 않은 것 같다. 차 타고 1시간을 가면 바레인에, 4시간을 가면 쿠웨이트나 카타르에, 좀 더 무리해서 9시간쯤 가면 아부다비에 도착한다. 비행기 타고 가면 제주도에 도착할 시간보다 조금만 보태면 도착할 수 있는 나라들도 넘치게 많다. (사실 그래봤자 중동이지만)

 

그렇게 여행은 익숙한 일상이었다. 내가 휴가를 가 있거나, 내 친구가 가 있거나 아는 누군가가 가 있다. 내가 갔던 곳에 친구가 곧 가거나, 친구가 갔던 곳에 내가 곧 가거나. 구글맵에서 종종 동네 사람의 후기도 만난다. 만나서 스몰토크 주제로 날씨만큼 빈번하게 '다음 휴가엔 어디 여행가?'라고 묻는 것이 익숙하고 '그래서 비엔나엔 맛집이 어딘데?'라고 정보를 공유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 동네.


그런데 여행의 이유라고?

그렇게 자주 가면서도 한 번도 자세히 생각해보지 않았던 여행의 이유. 과연 뭘까?

얇고 작은 하얀 책을 보며 이유는 5분 만에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는데? 하며 펼친 김영하의 '여행의 이유'.




20세기 이전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힘든 여행은 아랫사람을 시키고 높은 이유는 유람만을 했다고 한다. 금강산 유람에 간 조선 시대 선비는 하인에게 높은 봉우리를 다니게 했으며, '80일간의 세계일주'의 주인공은 배에서 내리지 않고 선실에서만 있고 하인을 통해 둘러보게 하는 "비여행"을 한다. 이는 오히려 여행지의 디테일에 함몰되지 않고 총체적 시각을 갖게 했다고 한다.

심지어 아예 여행을 가지도 않은 채 타인을 통해 여행을 대신하고, 상상력을 동원해 복원하며 글을 쓸 때 오히려 더 정확한 통찰과 재구성을 할 수 있다는 "탈여행"의 주장도 일부 나온다.

비여행과 탈여행도 과연 여행일까? 반대로 우리가 직접 두 발로 다녀왔다고 생각한 여행은 '진짜' 여행이었을까? 과연 그 도시를 잘 알고 잘 다녀왔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어쩌면 TV속 여행 프로그램에서 출연자들이 경험한 여행을 제작진이 선별하고 편집된 여행의 정수만을 본 시청자가 실제 여행한 출연자보다 더 높은 시각에서 넓은 범주의 여행을 한 것은 아닐까? 작가는 의문을 제기한다.



그래서 여행의 이유가 무엇이라고?

일상의 크고 작은 상처가 남아 있는 집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해서, 스스로 고통을 부과한 후 그 고통이 자신을 파괴하지 못한다는 것을 확인받아 안도감을 느끼기 위해서, 끊임없이 이동해야만 살아남는 인간의 본능때문에.. 그리고 노바디가 되기 위해서.


우리는 때로는 내가 누구인지 남들도 나도 모르는 곳으로 떠나고 싶어 한다. 가지고 있는 정체성, 역할, 해야 할 일 들과 같은 구속을 벗어던지고 내가 누구인지 잊어버리고 싶어 한다. 그래서 여행을 떠난다.

여행지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는 순간을 경험한다. 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로만 둘러싸이는 환경에 처하고만 만다. 자체로의 어떤 특별한 존재(somebody)가 아니라, '어린아이를 데리고 있는 긴 까만 머리의 여자 아시아인'으로서의 개별성을 잃어버린(주로 스테레오 타입으로 정의되는) 아무것도 아닌 자(nobody)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에서 오디세우스는 배를 타고 가던 중 외눈박이 괴물 키클롭스의 섬에 찾아 들어간다. 남의 섬을 불쑥 들어가 이것저것 뒤집어 놓는 것에 그치지 않고, 트로이를 고안하여 승리로 이끈 위대한 자신을 알아보고 대접하기를 바란다. 당연히 키클롭스는 분노하며 그의 일행들을 순서대로 와그작 먹어치운다.

오디세우스는 바다를 건너지 못하는 키클롭스를 건드리지 않고 무사히 여정을 즐길 수도 있었다. 그가 위험을 자초하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저자의 서술에 따르면 오디세우스의 마음이 허전했기 때문이다. 왕이고 영웅으로 언제나 섬바디(somebody)였던 그가 예측할 수 없는 바다 위에서 쪼그라진 자아를 갖고 노바디(nobody)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의 마음속에서 인정의 욕구가 고개를 든 것이다.


이렇게 자기가 누구인지를 자기만 아는 상태가 지속되면 키클롭스의 섬으로 쳐들어가는 오디세우스와 비슷한 심리상태가 될 수 있다고 한다. 우리의 정체성은 스스로 확인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타인의 인정을 통해 비로소 안정적으로 유지된다.

내가 사는 곳에서는 내가 누구인지를 나도 알고 다른 사람도 아는데, 여행에 가면 내가 누구인지를 나만 안다. 우리는 바로 키클롭스 섬에 도착한 오디세우스같이 되고야 만다. 저자는 이때 오디세우스가 느낀 유혹을 억제할 수 있느냐가 성숙한 여행의 관건이라 평했다.


과연 여행에서만 그런 것일까. 나는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과연 정말 '여행의 이유'인가 궁금했다. 읽는 내내 저자가 나에게 여행의 이유가 아니라 '삶(이라는 여정)의 이유'라 속삭이는 듯했다.


여름휴가 때 수술 후 호르몬제를 복용했어서인지 두 달간 우울증 비슷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별 일 아닌데 눈물이 난다던가 울적한다든가 그런 사소한(?) 증상은 없었지만, 내가 존재하는 이유에 대해 도저히 답을 찾을 수 없어 세상살이가 허무하고 또 허무했다.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르니 '굳이' '무언가'를 해야 할 필요성을 찾지 못해 드러누워 있었다.
그렇게 삶의 이유를 찾고 있는 즈음, 마치 삶의 이유를 굳이 굳이 찾아 내 앞에 가져다주는 듯한 이 책이 나에겐 큰 회복이 되었다.


누구나 노바디가 되고 싶어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떠났음에도 그곳에서도 인정을 받아 썸바디가 되고 싶은 것이다. 정체성은 스스로만이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때때로 썸바디가 됨으로써 유지될 수 있는 것이었다.

나는 무료하게 소파에 반쯤 누워서 손가락 관절이 아파올 때까지 핸드폰만 보는 무인도 속 오디세우스가 아니라, 내 정체성을 찾아 새로운 섬을 향해 배를 타고 나가는 오디세우스가 되어야 했던 것이다. 다만 무모하게 키클롭스에게 덤벼드는 자만을 주의하면서.


그렇게 삶이라는 배를 운영해야겠다는 의지가 아기 불꽃만큼 조그마하게 내 마음속에 불을 지폈다. 더 이상은 소파에 누워 카우치 포테이토처럼 보낼 수 없어! 이렇게 유익한 사색의 시간을 더 가져야겠다 생각했다. 그 길로 바로 주변 사람들을 모아다가 주 1회 독서토론시간을 조직했다.


부디 책 읽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반 강제성을 띈 작은 굴레를 만들었을 뿐인데 나와 이웃들은 무사히 그 굴레에 안착하여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재미난 사실은 여행의 이유가 삶의 이유가 되었던 것처럼 자기 계발서든 미술사책이든 소설책이든 우리는 늘 결국 인생에 대해 치열하게 토론을 한다.

'책'이라는 말의 동의어는 어쩌면 '삶'이었나 보다. 오늘도 타인의 삶을 읽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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