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1년 전 여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띠리리리, 띠리리리~
자정이 다 된 시각.
불 꺼진 방의 어둠 속 정막을 깨고, 휴대폰이 울렸다. 연희는 막 잠에 들려던 참이었다. 침대 옆 사이드 탁자를 더듬어 휴대폰을 확인했다. 발신자가 뜨지 않는 번호.
액정 화면을 보다 반대로 엎어버렸다. 벨소리는 멈출 기세가 아니다. 눈을 질끈 감으며 한숨을 쉰 뒤, 폰을 또 홱 뒤집어 액정 화면을 노려본다. 벨소리가 점점 다급해지는 느낌이다. 결국, 연희는 못 이기는 척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우와~, 여니다. 여니야? 여니야? 나야, 기주니.
점점 커지는 전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혀가 말린 채, 불명확한 소리가 길게 늘어져 불편하게 들려왔다. 이미 익숙한 듯, 연희는 아무 말없이 잠잠히 전화기만 들고 있었다.
- 여니야, 여니야, 나아~, 드~으뎌 나를 자바서(날을 잡았어). 그은데, 왜 이러케 스프냐(슬프냐)?
기준은 연희와 같은 해에 같은 과를 졸업한 3살 연상의 선배이자, 3년간의 연인이었고, 지금은 다른 여자의 남자이다. 헤어진 지 6개월째. 술만 취하면 뭐가 아쉬운 건지 연희를 찾았다. 오늘도 연희의 전화기를 놓아줄 생각이 없는 듯하다.
- 여니야, 내 마를 드꼬 인냐(말을 듣고 있냐)? 나, 나를 자밨다꼬....
헤어진 후 수개월간 흘렸던 눈물이 이제 겨우 마르나 했는 데, 기준의 눈치 없는 전화에 다시 눈밑이 흥건하게 눈물로 차올랐다.
차라리, 전화를 말지... 차라리, 행복에 겨워 죽겠다고 자랑을 하지... 그래야, 연희가 맘 편히 미워라도 할 텐데, 술만 취하면 자신을 잡아달라고 연희에게 애걸복걸을 하니 밉기는커녕, 사랑보다는 실리적 선택으로 괴로워하는 기준이 안쓰러웠다.
- 여니야? 자? 너, 그러며언, 아안돼. 여니야? 여니야? 나 자바야지. 나 자바. 나 가지 마라고 부짜버(나 가지 말라고 붙잡어). 오느을 아안 자브며언 끄치야(오늘 안 잡으면 끝이야). 제에바아알, 나 조옴 가지마라꼬 해~애 줘.
기준은 진심인지, 아쉬움에 하는 허튼소리인지 말로써 연희 마음을 뒤숭숭하게 흔들었다. 설령, 진심이라 하더라도 기준에게 축복이 될 그녀인 것을 알기에 마이너스 인생일 뿐인 연희는 열등감과 자괴감에 그를 붙잡을 수 없었다. 연희도 기준의 상황이면 그와 같은 선택을 했을 수도 있겠다고, 그가 이해되는 현실이 연희를 더 슬프게 만들었다.
연희는 전화기 속 외침을 가급적 외면하고 싶었다. 또한, 기준 몰래 서글픈 현실에 훌쩍이고 있는 소리를 들려주고 싶지도 않았다. 기준은 기준대로 마음 풀고, 연희는 연희대로 마음풀리도록, 전화기를 저만치 손 닿지 않을 만큼 멀찍이 침대 아래쪽 발 옆에 내려놓았다.
지금은 기준이 연희를 찾고 있어도, 내일 아침이면 또 새로운 영혼으로 거듭나 바로 재단 이사장 딸의 연인으로 살아갈 것이 눈에 훤히 그려졌다. 눈을 감아도 그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져서 쉽게 잠들 수가 없었다. 연희는 방학이라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다시피 했다.
기준과 헤어진 후 맞는 첫여름이다. 또한, 교사가 되어 맞이하는 첫여름 방학이기도 했다. 하지만, 특별한 계획은 없었다. 학자금 대출을 다 갚을 때까지는 취업을 했어도 수험생 시절과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단지, 대출금을 조금 더 안정적으로 갚을 수 있을 뿐이었다.
언제 잠들었는지, 연희는 새벽 늦게 잠이 들어, 다음날 정오가 되어서야 눈을 떴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에 눈을 쉬이 뜨지 못하고, 몸을 반쯤 일으켜 침대 위를 더듬어 휴대폰을 찾았다. 발 밑에 두고 잠들었던 거 같은 데, 아직 완전히 깨지 못하여 쉽게 찾지 못했다. 무릎까지 꿇고 발밑 쪽 이불을 들추며 수색을 하자 침대 모서리 끝에 떨어질 락 말락 아슬아슬하게 놓여있는 폰이 잡혔다.
손가락을 모서리에 대어 지문을 인식시키자 휴대폰 잠금이 풀렸다. 정오쯤이나 되니, 각종 메시지 알림 창이 줄 세워져 있었다. 하나씩 확인하며 지워갈 때, 흥미로운 DM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 연희 씨를 만나고 싶습니다.
뭐지? 스미싱인가? 조건 만남? 어떤 놈이 이런 헛짓거리를? 치열한 자본주의 경쟁사회에서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내동댕이 쳐진 연희에게, 이젠 똥파리까지 꼬이는 느낌이었다.
'뭐지? 정의실현욕구를 자극하는 이 메시지는...'
연희는 두 입술을 꽉 깨물며, DM 발신자의 계정으로 들어가 보았다. 근데, 에게게? 태평양인지, 대서양인지 알 수 없는 어느 바다 위에 유유자적 떠있는 요트 한 척만 보이는 사진 한 장이 전부다.
기준한테 맞은 뺨을 여기서 분풀이라도 할 기세였지만, 뭔가 단서가 없어도 너무 없다. 그래서, 연희는 조금 더 단서를 잡아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름, 나이, 직업, 전화번호 간단한 소개부탁드립니다. 진실됨을 보고 만남을 결정하겠습니다."
띠링~
- 이름은 김선우. 직업은 OO 고등학교 교사, 나이 27, 전번 010-4321-5678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답변이 왔다.
다른 무엇보다도 연희에게 OO 고등학교가 눈에 들어왔다. 연희는 무작정 인터넷을 검색하여, 그 학교로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로 상냥하고도 경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반갑습니다. OO 고등학교, 교사 XXX입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김선우 선생님, 계신가요?"
- 아~, 김선우 선생님은 방학 중이라 오늘은 출근 안 하셨습니다. 혹시, 전해 드릴 말씀이라도 있으실까요?
"아, 아니에요. 그러면, 직접 통화하도록 하겠습니다."
DM을 보낸 선우의 저의를 연희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무시하려 할 때마다 호기심이 더 크게 일었다. 그래도, 교사식이나 되는 사람인 데, 이상하면 얼마나 이상할까 싶어, 메시지의 진정한 의미를 자꾸만 캐내고 싶어졌다.
더군다나, 어젯밤 기준 선배의 취중진담인지, 취중농담인지 때문에 잠시 잊었던 현실자각에 우울한 기분만 잔뜩인 지라 신선한 새로운 것을 시도해 보고픈 마음도 생겼다.
'답변이라도 한번 해볼까? 뭐라고 하지?'
'아냐, 아냐, 이러다 정말 나쁜 사람 만나면? 아님, 외모가 폭탄이거나, 인격 파탄자, 것도 아니면 변태 성욕자..?'
'아니지. 사기꾼이었으면, 로또나 재테크 같은 빌미라도 제공했을 거고, 변태 성욕자였으면, 음란한 문자라도 한마디 곁들였을 텐데, 그러기엔 문장이 너무 정상적으로 말랑한 것 같기도 하고... 신분은 확실하니까 이상한 사람은 아닐 거야...'
'연희야, 잘 생각해. 잘 못하다간 도와달라는 소리도 한번 못 질러보고 섬에 팔려갈 수도 있어.'
연희는 투명인간 친구라도 있는 듯, 허공의 누군가와 말을 주고받으며, 무시해 버려도 그만일 것 같은 DM 하나로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히잉~ 이게 다 복에 겨워 술 퍼먹고 헛소리만 하는 선배 때문이야... 나더러 어떡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