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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야블라썸 Mar 11. 2023

잔잔한 가슴에 파문이 일면...

#3. 토요일, 저녁 7시

'설령, 팔려가면 팔려가는 거지. 지금 내 인생보다 더 꼬일까? 지금보다 더 최악은 아닐 꺼야.'


연희는 1박 2일을 고민하다 호기심에 못 이겨 답장을 했다.


- 내일 토요일 저녁 7시, 가능한가요?


선우에게서 바로 답장이 왔다.


- 네. 어디서 만나는 게 편하신 가요?


연희는 낯선 이에 대한 궁금증이 크긴 했지만, 소개팅처럼 격식 차리고 만나서 분위기 맞추고 대화까지 하기는 상당히 번거롭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럴 기분도 아니었다. 잠시 선배 때문에 흔들리는 생각들을 분산 시킬 정도의 시간 때우기면 충분했다.


외모만으로 사람을 판단하기엔 섣부르지만, 정상적인 루트를 통하지 않은 이런 만남에는, 평범하지 않은 사람이 나올 확률이 높다는 불안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연희에게도 기분 전환은 필요했고, 혼자 임용에 합격해 버린 터라 아직도 고시생인 친구들로 인해 영화를 못 본지도 좀 되었다. 그렇다고, 혼자 영화보는 일은 더 처량할 것 같았다. 차라리, 낯선 누군가라도 함께 한다면 덜 처량하기도 할 것이고, 만남도 덜 부담스러울 것 같았다. 영화를 보면, 대화를 별로 하지 않아도 되니까.


-  우리 영화 같이 보는 거 어떨까요? DGV 행복점에서 봐요.


- 네. 그게 편하시다면, 그렇게 해요.


선우라는 남자는 쉽게 연희의 말을 잘 들어줬다. 매너가 있는 건지, 요령이 있는 건지 아직 연희는 그를 1%도 신뢰할 수 없지만, 그래도 동종업계니, 인격적으로 완전히 이상한 사람은 아닐 거라는 묘한 믿음이 생겼다. 외모적으로만 조금 부족한 착한 남자가 아닐까 짐작할 뿐이었다.


토요일 저녁 7시 10분 전.

연희는 소라색 무지 반팔 블라우스에 옅은 베이지색 리넨 팬츠를 입고서, DGV 행복점 입구에 서 있었다. 쇄골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윗 단추 두 개가 풀린 블라우스 너머로는 화이트 골드 체인에 연희의 이니셜 Y모양의 펜던트가 빛나고 있었다.


굵은 웨이브 진 긴 앞머리는 제법 까만 눈동자의 큼직막한 오른쪽 눈 위를 지나 우아하게 오른쪽 귀 위에 단정하게 위치하고 있었다. 못 보고 지나치지 않도록 고개를 빳빳이 들고, 두 눈을 제법 동그랗게 뜨고서 왼쪽으로 한번 보다가, 정면도 살피고,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어느 방향에서 나타날지 모를 김선우라는 남자를 기다렸다.


연희가 일찍 도착한 것은 나름 그를 위한 배려였다. 그 남자는 이미 SNS로 연희의 얼굴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얼굴은 진짜가 아니라고 연희는 생각했다. 이쁜 사진만 올려진 SNS를 보다가 연희의 실물 영접을 하고서 혹여라도 남자가 실망을 한다면, 도망칠 기회를 주고 싶었다.


연희는 그를 기다리면서, 매 1초가 지날 때마다 마음을 비우며 외모에 실망치 않겠다고 되뇌였다. 그의 외모에 대해서는 마음을 내려놓았음에도, 약속 시간이 다가올수록 연희는 초조해졌다. 만약, 약속 시간이 지나도 그가 안 나타난다면 연희는 몇 분까지 기다려주는 게 맞는 건지 그런 현실적인 생각에 매달렸다.


차가 밀렸다는 가정하에, 십분? 이십 분? 그가 멀리서 오는 거니까, 삼십 분? 혼자서 계산도 안 되는 계산법에 휘말려서 멍해져 있는 그 순간, 키 178센티 정도에 군살없어 보이는 체형의 남자가 단정한 흰색 셔츠에 잿빛 슬랙스를 입고서 새하얀 이를 드러내 웃으며 연희에게 다가왔다.


"저기, 이연희 씨 되시죠?"


"아~ 네. 안녕하세요. 김선우 씨?"


"네에~."   


선우는 기준 선배만큼 체격이 큰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폭탄도 아니었다. 옆으로 긴 서글서글한 선한 눈동자를 가진 사람이었다. 연희의 걱정이 무색했을 정도로 훈남 내 풍기는 보통의 평범한, 아니 평범보다는 그 이상의 남자였다. 영화 한번 같이 볼 파트너로서 선우의 외모는 훌륭했다. 기다리는 동안에 연희가 했던 상상이 미안하고 무색할 정도로.  


영화를 무사히 볼 수 있기만을 바랬던 연희는 선우를 직접 보자 영화가 끝나면 어떻게 해야 되나 생각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영화가 끝나면, 시간이 늦었으니 그냥 집으로 돌아가자고 해도 자연스러울 것 같았다. 혹여나, 커피 타임을 원한다면, 그건 다음 만남의 여지를 주는 것 같아서 조금 고민이 될 듯했다.


영화가 끝나고, 선우는 아니나 다를까 별다른 대화 없이 바로 헤어지기는 아쉽다며, 커피 한잔을 권했다.


"죄송하지만, 제가 현재 별로 제정신인 상태는 아니에요."


"네에?"


"DM 하나에 만남을 수락해서 제가 조금 쉬운 여자 느낌이었죠?"


"그런 게 아니라..."


"저 그렇게 쉬운 여자 아니에요. 지금 제정신이 아니라서, 바람 쐬는 기분으로 나온 거예요."


연희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말에, 선우의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런 만남에 대한 연희의 우려는 어쩌면 선우의 우려가 아니었을까?


선우의 당황한 모습이 오히려 연희를 당황케 했다. 선우도 연희를 만나면서, 그녀가 이상한 여자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더 이상한 여자로 보인 걸까?


"사실, 저는 이연희 씨를 조금은 알고 있어요. 저도 아무한테나 DM 보내는 사람은 아니란 거 정도는 알아주시면 좋겠네요. 밤늦었으니, 일단 집까지는 바래다 드릴게요."


자기를 조금은 알고 있다는 말에 연희는 만남에 관한 의문들이 조금은 정리되는 듯했다. 하지만, 더 이상 묻지는 않았다.


 이때부터였을까? 연희에게  불온한 생각으로 접근한 게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해져서 낯섦에 대한 경계감이 완전히 허물어졌다. 그냥 이 남자 차를 타고 집에 가는 게 택시 타는 것보다 더 안심될 것 같았다.


선우의 차를 타고 집으로 오는 동안 내내, 연희는 어젯밤 만취해서 전화한 선배를 생각했다. 오늘 처음 만난 남자의 친절과 배려 덕을 톡톡히 보고 있음에도 연희는 이렇게 또 헤어진 남자를 생각하고 있었다. 낯선 남자일 뿐이지만, 조금은 선우에게 미안했다. 정신을 차리니 벌써 연희가 말한 목적지까지 다 왔다.


"오늘 너무 고맙기도, 너무 미안하기도 하네요."


"네? 뭐가 고맙고, 뭐가 미안하신지..."


"현재 제가 제정신이라 아니라서... 먼저, 양해 구할게요. 죄송해요."


연희는 말 끝나기가 무섭게 냅다 그를 향해 몸을 일으켜 짧게 입을 맞추었다. 연희는 입술을 떼면서, 이내 곧 그의 눈치를 살폈다. 선우는 갑작스러운 그녀의 돌발 행동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정상적인 연인 관계였다면 더없이 설레고 행복한 순간일 텐데, 지금 이 순간에는 어찌 반응해야 할지 선우가 더 당황스러웠다.


2년 전부터 그녀와 좋은 관계가 되기를 혼자서 꿈만 꾸었던 선우였다. 그 마음은 순백의 연정이었다. 그녀가 잘 되길 바라는 마음, 그녀를 지켜주고 싶은 마음, 그녀를 아껴주고 싶은 마음, 멀리서라도 그녀를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 등 불순한 마음 1도 없는 순도 100% 마음뿐이었다.


그 순백의 잔잔하던 마음에 연희의 행동은 굉장한 파문을 일으켰다. 짧은 입맞춤이 26년간 잠들었던 야수의 본능을 깨운 것 같기도 했다.


흔들리는 선우의 눈빛을 바라보던 연희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지금 그녀가 원하는 것을 모른 척하자니 그녀를 무시하는 행동 같고, 그녀에게 응해주자니 그동안 고백 못하고 미뤄뒀던 선우의 순백색 마음이 한순간 변질되는 느낌이었다. 그녀를 존중하는 게 먼저일까? 자신의 연정을 지키는 게 먼저일까? 선우는 잠시 고민했다.


연애 시 풀 수 없는 난제를 만나면, 정답은 무조건 그녀라고 첫 연애에서 배웠던 선우였다. 열쇠는 그녀가 쥐고 있다고 선우는 생각했다. 눈을 뜨지 못하고 파르르 떨리는 연희의 긴 속눈썹 위로 그의 속눈썹이 닿을 듯 거리를 좁혔다. 선우가 서서히 부드럽게 다가가자 연희는 스며들어 서로의 호흡이 하나로 맞춰졌다.


연희의 머릿속에 맴돌던 선배의 취중진담은 서로의 스며듦 속에 지워지기 시작했고, 선배의 말이 다 지워질 때까지 연희는 선우를 놓지 않았다. 선우 또한 기사도 정신이라도 구현하듯 그녀가 먼저 일어나기 전까지는 안 일어날 기세였다.


연희는 나쁜 년이라는 말을 들을 각오까지 했다. 오늘 만남의 목적이 선우에게 무엇이 되었든 간에, 연희에게는 제 머릿속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는 거였으니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승용차 앞 유리창 위로 고양이가 풀썩 내려앉았다. 번쩍이는 날카로운 회색 눈동자로 고요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차 안 남녀의 거친 숨소리가 들리자 고양이는 놀라 털을 쭈삣 세우며,  '냐~옹'이라고 외쳤다.


고양이 소리를 듣고서 두 사람은 놀라 거리를 두며, 무안한 듯 웃었다. 웃음소리에 고양이는 후다닥 담벼락 쪽으로 뛰어내렸다. 그제야, 두 사람은 제정신이 돌아왔다. 연희는 이런 일이 첫 만남에 일어난 것에 대해 스스로에게 상당히 놀랐다. 그것도 족히, 한 시간이 넘게 지속되었다니....


연희는 3년 사귄 기준과 첫 키스하는 데도 1년이 넘게 걸렸다. 사귐이 길어지자, 기준은 그 이상의 관계도 조금은 바라는 눈치였는 데, 유교걸인 연희는 좀처럼 허용하지 않았다. 이런 보수적인 면도 기준과 헤어지는 데 분명 한몫을 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연희는 오늘 이 어려운 것을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단번에 해버렸다. 마치, 자신을 버리고 간 기준을 원망이라도 하듯이. 자꾸만 연희를 잊기 힘들다고 취중에 전화를 하는 기준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연희는 어릴 적 젖 먹던 힘까지 다 끌어모은 듯 Y 모양의 펜던트에 습기찰 때까지 입맞춤을 오래 해 보기도 처음이었다.


"정말 오늘 제가 왜 이런지 모르겠어요. 이런 저라도 괜찮다면..."


무슨 말을 하고픈 지도 모른 채, 뇌를 거치지 않은 말이 막 흘러나왔다.


"괜찮다면?"


"포커스는 '이런 저'에 있어요. 제가 말씀드렸다시피, 제정신이 아니어서 지금처럼 비이성적인 행동을..."


"그럼 괜찮다면, 사귀자는 말?"


"......"


연희는 선뜻 그러자고 답변을 할 수가 없었다. 지금은 연희도 본인 스스로를 모르는 상태이다. 더군다나, 본인도 모르는 연희의 속사람은 이렇게 느닷없이 충동적으로 결정하고 행동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더욱 뭐라 답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정말 선배를 잊고 싶은 건지, 그저 잊으려 애쓰고 있는 건지 연희 스스로의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아직도 선배에 대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이 사람을 만나는 이유는 선배를 대신하기 위함일 것이다. 특히나, 선배에게 못해 준 부분은 오늘처럼 다른 사람에게 폭발적으로 표현할 것 같았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위험한 상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예의도, 상도도 아닌 것을 알고 있었다.


연희는 집에 들어가서 씻고 누워, 이 밤 동안에는 더 이상 선배 생각을 하지 않았다. 대신, 뭔가에 홀린 듯 지금껏 선우에게 한 행동이 자꾸 떠올랐다. 유교걸인 그녀를 견디기가 조금 힘이 든다고 투정 부렸던 선배가 미워서 미쳐버린 거라고 혼자 결론을 내리며 공중에 헛웃음을 날렸다.


선우가 집에 잘 들어갔는지는 그리 궁금하지는 않았다. 선우 또한 잘 들어갔다는 연락조차 하지 않았다. 차 안에서의 가까웠던 거리는 차 밖으로는 들고 나올 수 없는 그런 은밀하고도 감추어야 할 그 무엇이 된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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