엇갈리는 두 개의 기억
#4. 토요일, 저녁 7시
일요일 오전 6시.
알람이 울리기를 몇 번 반복했는지 모른다. 평소보다 조금 힘들게 깨어난 선우가 알람을 끄고 정신을 차리자, 침대 헤드에 기대어 자신의 가랑이 사이를 문득 쳐다보았다.
'나도 이렇게나 건강한 남자인데... 연희 씨도 참...'
잠시 눈을 감고, 차분히 숨을 고른 뒤, 욕실로 갔다. 주말이면 더 바쁘신 어머니는 벌써 나가신 듯 부엌과 거실이 조용했다. 이를 닦으며, 거울을 보니 밤새 자란 수염이 턱 주변에 듬성듬성 보였다. 쉐이빙 폼으로 뺨과 턱을 하얗게 덮고서 오른쪽 왼쪽으로 얼굴을 돌려 면도를 하다 보니, 묘하게 연희가 떠올랐다.
'어제, 이 각도였나? 아님, 이 각도? 아휴... 지금 무슨 생각을...'
'근데, 잠깐, 오른쪽이 좀 더 잘 생겨 보이나?'
선우는 혼자 거울을 보면서, 알 수 없는 묘한 새로운 즐거움이 가슴속에서 차올라 연신 미소 지어졌다.
'그런데, 연희 씨를 다시 볼 수는 있는 건가?'
'아~, 첫 만남에 너무... '
연애라곤 군대 가기 전 과동기랑 6개월 정도 사귀어본 게 전부인 선우는 이제 모든 단계, 모든 과정에 의문이 생겼다. 어제 너무 섣부른 행동을 한 것은 아닌 지 왠지 소심해져서 연희에게 먼저 연락할 엄두를 못 내었다.
'모르는 문제의 정답은 무조건 그녀다.'
혼자 조용히 읊조렸다.
테니스 동호회 모임에 가려고, 하얀 폴로셔츠에 검은색 반바지를 입고 차를 몰고 나왔다. 일요일 아침 막힐 거리가 아닌데, 갑자기 2, 3 차선의 차들이 엉켜 속력을 늦추며 엉거주춤한다. 무슨 일인가 싶어 운전석 쪽 창문을 내려 고개를 내밀고 보니,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 한분이 조금은 멀리 떨어져 있는 횡단보도까지 가시기 힘드신 지 무단횡단을 하고 계신다.
선우는 깜짝 놀라서, 즉시 차를 멈추고 비상등을 켰다. 저 멀리서 사정을 모르는 차는 경적을 울렸다.
'그래도, 사람이 먼저지, 차가 먼저냐?'
선우는 속으로 대꾸하며, 차에서 얼른 내려, 한 손을 이마쯤 올려 미안함을 표시했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자그마한 키로 차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할머니 한 분을 가리켰다. 사정을 이해한 차들이 이제는 조용하다. 선우는 얼른 할머니께로 뛰어가, 한쪽 어깨 밑을 부축하여 길 건너는 것을 도와드렸다.
"할머니, 걷기가 많이 힘드시죠?"
할머니는 눈만 껌뻑껌뻑하신다. 말귀를 알아들으시는 건지, 치매가 있으신 건지 알 수는 없지만, 그저 오늘 처음 본 낯선 할머니가 자기 할머니 같아서 모른 척할 수가 없다.
"할머니, 힘드셔도 꼬옥 저어기 신호등 있는 데서 건너셔야 돼요. 안 그럼, 큰 일나요. 지금도 많이 위험했고..."
할머니께서 고개를 끄덕이시며, 부축해 드린 손을 꼭 잡고선 놓지 않으신다. 도로 한가운데 맥락 없이 정차 중인 선우 차가 비상등만 조급하게 깜빡 깜빡이며 주인을 부르는 듯하다. 말씀은 없으셨지만, 분명 할머니는 속으로 선우에게 고맙다고 말을 하고 있는 거라고 선우는 생각하며 잡은 손을 놓아줄 때까지 재촉하지 않았다.
8월 초.
사람들은 모두 휴가를 떠난 것인지, 테니스 코트가 있는 도심의 공원은 한적했다. 강물은 잔잔히 햇빛 따라 크고 작은 윤슬을 만들며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반짝이는 윤슬을 보니, 대학 때 처음 보았던 연희의 모습이 떠올랐다.
***
복학 후, 졸업 동시 임용고시 합격의 꿈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를 하던 5월의 어느 날. 선우는 늦잠을 자서 1,2교시 수업에 결석하고 말았다. 다행히 교수님이 출석은 안 부르셨다고 하지만, 놓친 수업을 따라잡기 위해 수업에 참석한 과 후배의 책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후배가 알려준 방을 찾아 노크하고 문을 열었을 때,
"어! 선배 왔어?"
웃으며 맞아주는 후배 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열린 창문 사이로 5월의 신선한 바람과 함께 따사로운 햇살이 들어와 눈이 부셨다.
"어. 내가 좀 늦었나?"
눈이 부셔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그 햇살이란 것이 정확히는 후배의 친구라는 이름 모를 그녀를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빛나고 있었다.
160 정도의 자그마한 키에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은 그녀. 동아리방 칠판에 무언가를 끄적이고 있는 짧은 소매밑 뽀얀 피부의 팔이 무척 길고도 가늘었다. 그녀의 미소 위로 풀어헤쳐진 굵은 웨이브의 머리카락이 볼을 스치며 살랑이고 있었다.
창문 사이로 들어온 햇살이 눈이 부시다 생각한 것은 선우의 착각이었다. 그 햇살은 창문이 없는 쪽으로 걸어 다니는 그녀를 따라다니며 빛이 나고 있었다. 기이한 자연현상인 가, 선우의 눈이 잘못된 것인가가 헷갈릴 정도로 뇌가 아찔하면서 정신이 혼미해졌다.
스물넷 청년의 눈에 비친 반짝반짝 빛나던 그녀.
그것이 연희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
청순한 그녀의 얼굴과 함께, 어젯밤 둘이 나눴던 그 열정까지 함께 떠올라 강물을 바라보던 선우의 얼굴이 갑자기 불그스레해졌다.
햇살처럼 해맑은 그녀와는 어울리지도 않게 26년간 넘게 선우 속에서 잠자고 있던 야수성이 그간의 순수한 연정을 얼룩지게 한 것 같아 선우는 잠시 괴로웠다.
그녀와 사귀게 되었다면 자연스레 하게 될 행위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첫 만남에서 뜻밖에 이루어진 충동적인 그 행동에는 0.1%라도 불순한 마음이 곁들여졌던 건 아닐지 괜스레 죄책감이 들었다.
테니스 코트장을 향해 강가옆 잘 다듬어진 길을 걸으며 그녀를 자꾸 떠올리니, 선우의 마음은 그녀의 속마음을 몰라 괴로운 심정에서 다시 한번 만날 수 있길 바라는 간절함으로 바뀌고 있었다.
테니스 코트장에는 동호회 회원 몇몇이 이미 도착해서, 게임을 하고 있었다.
"선우 왔구나."
"동희형, 나랑 한 게임?"
"그러자. 얼른, 신발부터 갈아 신어."
"응. 꼭, 아빠 같다니깐."
"뭐어? 이 자식이?"
"하하하"
동호회에서 친형제처럼 지내는 동희를 만나니 어젯밤 일로 심란하던 선우 마음이 정돈되는 느낌이었다.
테니스화로 갈아 신고, 네트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며 악수를 했다.
"일단 몸풀기로 연습볼부터."
"어, 그래. 먼저 서브 넣어줘."
쳉~ 쳉~
라켓을 맞는 공소리가 청명하게 아침 공기를 갈랐다.
"어이, 오늘 텐션 좋다. 좋은 일 있어?"
"그런가? 좋은 일은 희망사항."
체엥~ 쳉~
오늘따라 공이 라켓에 감기는 소리가 텐션이 높다. 선우의 마음까지 실어서 치는 공이라 더 힘이 실린다.
그녀는 왜 선우에게 그런 시도를 한 것인지, 왜 그런 것을 원한 것인지, 이런 상황에서 연희는 다시 그를 만나고 싶어 할지, 알 수 없는 연희의 마음을 자꾸만 헤아려보고 싶던 선우는 테니스 공에 집중하면서 의문투성이던 그 마음들을 코트 위 공기 중으로 날려버렸다.
그날 이후로 연희에게서 이렇다 할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선우는 연희에 대한 두 개의 엇갈리는 기억만을 간직한 채 먼저 연락하지도 못했다. 선우가 그저 궁금하여 들여다보는 그녀의 SNS에서도 별다른 소식 하나 업데이트 되지 않은 채, 개학을 맞았고 선우의 변화 없는 루틴은 공원옆 강물처럼 잔잔하게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