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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야블라썸 Mar 18. 2023

두려움없이, 간절히.....

#5. 토요일, 저녁 7시

10월의 첫째 주 금요일 밤.


띠리리리. 띠리리리.


중간고사가 끝난 날이라 긴장감을 풀고 일찍 잠자리에 누운 연희는 머리맡에서 울리는 휴대폰을 확인했다. 이미 연락처에서 지워진 지 오래된 번호였다. 지워진 번호였지만, 누군지 모를 수 없는 번호. 기준의 전화였다.


오늘은 또 무슨 소리로 심란하게 만들려는 지, 겉으로는 기준을 쿨하게 보냈지만, 마음으로는 한 번도 보낸 적이 없는 사람이라 매번 걸려오는 전화 때마다 받을까 말까 망설여졌다. 취중의 기준이라면, 안 받으면 받을 때까지 전화할 것이 뻔해서, 연희는 못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어, 연희야.


오늘은 뜻밖에도 취중이 아니었다.

- 연희야, 지금 잠깐 나올 수 있어? 너희 집 앞이야.


기준 특유의 저음이 연희의 가슴을 저릿하게 울렸다. 하지만, 제정신의 기준이면 만나서는 더 안 될 것 같았다. 제정신이라는 점이 흔들리는 연희의 마음을 강하게 다잡아 주었다.


"저, 지금 바빠요. 돌아가요, 선배."


- 아냐, 오늘 진짜 마지막이 될 거 같아서... 잠깐만 얼굴 보자. 너 나올 때까지 기다릴게.


창밖을 보니, 추적추적 내리는 가을비 속에 검은 우산 하나가 보였다. 가을비와 기준의 고집. 이 조합은 연희의 마음을 한없이 더 나약하게 만들었다. 입고 있던 회색 트레이닝복 위에 가벼운 바람막이 점퍼를 급히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대문이 열리자, 기준이 눈꼬리가 내려오는 슬픈 눈으로 입꼬리를 올려 방긋한 표정을 지었다.


"오랜만이네..."


"......"


"오랜만에 저기 '나무 위 커피'에 가볼까?"


"저 하다가 나온 일 있어서, 바로 들어가 봐야 돼요."


"급한 거 아니면, 삼십 분만. 아니, 십 분만이라도."


"하~아..."


연희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넌 어떻게 그렇게 매정하니? 한 번도 나를 붙잡지를 않아?"


"제가 붙잡아야 하는 거였어요?"


"내 실수를 네게 말한 것은 너랑 헤어지고 싶어서가 아니라, 너에게  용서받고 싶어서였어. 너랑 사귀면서, 다른 여자랑 잔 걸 숨긴 채 그렇게 계속 만날 수는 없잖아."


"그런 얘기가 지금 무슨 소용이에요."


"아냐, 중요해. 내 실수가 헤어질 만큼의 큰 것일까라고 묻는 의문문이 어찌 그렇게 헤어지자로 해석되는지... 용서의 여지는 1도 없는 네가 그 순간은 얼마나 밉던지... 근데, 헤어져보니까 그 미움까지도 사랑이라는 게 더 명확해지더라."   


"선배만 저 사랑하나 봐요? 전 이제 선배 별로 기억 안 나요..."


연희는 가냘프고 느릿한 목소리로 마음에도 없는 모진 말을 하며 기준을 쫓아 보내려 애썼다.


"휴우~ 연희야... 네 말 진심 아닌 거 알아. 그때 헤어지자고 말했던 내 말도 진심 아니었고. 우리의 진심은 서로 아직도 못 잊고 사랑하고 있다는 거잖아."


이제는 멈췄다고 생각한 연희의 눈물이 눈동자를 붉히며 눈치도 없이 터져 나오기 일보 직전이었다. 연희는 엉엉 울면서 펑펑 쏟아내고 싶은 눈물을 애써 감추려 꾸역꾸역 목구멍까지 눌러 삼켰다.


"연희야, 오늘이 진짜 마지막 기회일 것 같아서 왔어. 지금이라도 네가 붙잡으면, 나 내일 결혼식장 안 들어갈 수도 있어. 지금의 선택에 정말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그건 제가 선배에게 묻고 싶네요. 지금의 선택, 정말 후회 안 할 자신 있어요?"


"나도 그걸 모르겠다. 그래서, 마음속에는 너로만 가득한 데, 생각만큼 적극적으로 붙잡지 못하는 거겠지?"


"서로 후회 없는 삶 살아요. 이젠 잊기로 해요. 저는 이미 다른 사람 만나고도 있고..."


눈물을 삼키느라 힘겨운 연희는 못내 거짓말을 해버렸다.


"아, 그.. 래?..."


기준은 생각지도 못한 연희의 답변에 말을 더듬었다. 그렇게, 연희는 둘의 사랑이 끝났음을 기준에게 확실하게 보여줬다.


"앞으로는 전화도 말고, 찾아오지도 말고, 그분이랑 행복하게 잘 살아요, 선배. 저 이만 들어갈게요"


연희가 이렇게 먼저 돌아서지 않으면 기준에게 눈물을 쏟아낼 것 같았다. 연희는 돌아서서 참고 숨겼던 눈물을 흘리며 집으로 들어왔다. 자신의 방에 도착해서는 불도 켜지 않은 채, 얼굴을 베개에 묻고 꺼이꺼이 소리 내어 대성통곡을 하고 말았다.


통곡의 울음이 잦아들자, 연희는 문득 선우가 떠올랐다. 기준에게 말했던 만나는 사람. 선우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와 있으면 첫 만남에서처럼 기준을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급하게,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르. 뚜르르르. 뚜르르르.


신호음 세 번 만에 선우는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오랜만이네요. 잘 지냈어요?"


- 네. 연희 씨도 별일 없는 거죠?


연희는 숨을 길게 들이마시며 말했다.


"이제 별일 좀 만들어 보려고요. 내일 시간 되세요?"


- 내일요? 제가 좀 바쁜 사람이긴 하지만, 연희 씨가 오랜만에 전화를 주셨으니...


"그럼, 만나요, 우리. 내일 저녁 7시"


- 장소는요?


"아, 장소는 제가 미처 생각을 못 했네요."


- 그럼, 일단 제가 연희 씨 집 앞으로 시간 맞춰 갈게요. 장소는 천천히 정해요.


"네, 고마워요. 제 전화받아줘서. 잘 자요, 선우 씨."


- 네. 연희 씨도 좋은 꿈 꾸고, 낼 봐요.


선우의 차분한 목소리에 기준이 들쑤셔 놓고 간 연희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3년을 사랑해도 헤어지는 데, 6개월을 만나서 결혼 결심을 한다는 자체가 확신하기 어려운 힘든 결정이 아니었을 까 싶어 연희는 오늘도 기준에게 했던 모진 말과는 달리 기준을 이해했다.


내일이면, 기준은 결혼이라는 것으로 그들 사랑의 반쪽을 지울 것이다. 이제는 반쪽만 남았다. 그것은 연희의 몫이다. 연희만 지우면 그들의 사랑은 완전히 지나간 사랑이 된다. 현재 마음속에 남은 사랑을 지워버릴 그것. 연희는 그것을 간절히 찾고 싶었다. 두려움없이, 간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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