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색 수국이 연한 홍색으로 변하여 잎이 하나둘씩 떨어져 7월의 길목에 들어섰다. 기말고사가 끝나자 또 한 번 학교는 바쁘게 굴러갔고, 연희로서는 두 번째 여름방학을 맞았다.
연희는 여름 방학을 하고서 처음 며칠은 잠만 잤다. 학기 동안에 긴장해 있던 몸이, 방학이 되니 풀어져서 그동안 쌓인 줄도 몰랐던 피로를 그대로 느꼈던 것이다. 그렇게 밤인지, 낮인지 구분도 못하고 밥 먹고, 자고, 밥 먹고, 자고를 계속하던 어느 날, 드디어, 교사로서 사회생활을 시작한 민아에게서 전화가 왔다.
- 언니, 방학했지?
"어. 너도 했어?"
- 어. 나 지금 처음 방학이란 걸 해보는 것처럼 막 흥분돼. 언니, 방학인데 우리 이대로 보낼 수는 없잖어.
- 그러지 말고, 국내라도 잠시 바람 쐬고 오자. 해외 못 가면, 비행기 타고 제주도라도...
"일단, 엄마랑 이야기해 볼께. 엄마는 병원 계신 데, 나만 여행 다녀오겠다고 말하기가 좀 그렇긴 해."
- 허긴, 그렇네. 미안해, 언니. 괜히, 내가 들떠서 언니 마음만 들쑤셔 놓은 거 아냐?
"아니, 전혀. 사실, 나도 콧구녕에 바람은 넣고 싶다."
- 알았어. 그럼, 언니가 하자는 대로 할께. 갈 수 있게 되면 내게 말해줘. 준비는 내가 다 할께.
"하하, 울 민아 이럴 때 든든해서 좋다."
민아의 콧소리가 들어간 흥분된 명랑한 목소리가 연희는 부러웠다. 응당, 청춘이라면 그런 소리를 내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구석의 방바닥만 보면서 지난 사랑에 눈물짓는 청승 말고, 새로운 만남을 찾아 호기심을 갖고 새 공기를 찾아다니는 것이 청춘이라 생각되었다.
꺼내기 어려운 말이었지만, 김여사에게 말했더니 흔쾌히 허락해 주었다.
"연희야, 너 학자금 갚는 것도 중요하지만, 몇 달 더 빨리 갚겠다고 니 청춘 허비하지 마라. 긴 인생 놓고 보면, 몇 달, 몇 년 더 빨리 뭔가를 이루는 거 아무 의미 없다. 최선의 사소한 순간들이 모여서 행복이 되는 거야. 현실에 얽매여서 최선의사소한 행복들을 놓치고 살지는 마. 그래야, 엄마가 너한테 덜 미안할 거 같아."
김여사의 마음을 헤아려주려고 한 행동들이 오히려 김여사를 더 미안하고 슬프게 만든 것 같아, 연희는 조용히 김여사를 끌어안았다. 김여사는 그런 연희를 더욱 꼬옥 껴안아 주었다. 꽃이 피는 것도 모두 제각각 시절이 있는 것인데, 꽃망울도 못 터트리고 져 버릴까 봐 연희가 안타까웠다. 품 안에 있는 연희의 등을 토닥이며 아름다운 청춘으로 반드시 피어나길 진심으로 응원했다. 피어라, 청춘아!
며칠 후.
민아는 추진력이 상당히 좋았다. 아니, 연희에게 처음 전화를 걸었을 때부터 몰래 준비라도 한 듯, 숙소 빼고는 비행기 항공권부터 대체적인 일정까지 다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일정 조율을 위해 민아가 '나무 위 커피'에서 기다리고 있다며 전화를 걸어왔다. 7월 말 눅눅하고 뜨거운 공기를 피해 연희는 가벼운 트레이닝 복 차림에 크록스 슬리퍼를 끌며 야구모자를 눌러쓴 채 카페에 들어섰다.
카페 문을 열자, 시원한 마른 공기가 연희를 반갑게 맞았다.
"언니, 여기!"
민아가 한 손을 들어, 손으로 북이라도 치는 듯 호들갑스럽게 흔들며 연희를 맞았다. 그런데, 민아 혼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
민아 옆에 앉은 사람을 보니, 연희는 너무 편안한 차림으로 나온 게 민망스러웠다.
"이게 어찌 된 일이야?"
영문을 모르는 연희가 민아에게 조용히 물었다.
"하하, 여자 둘이만 여행 가도 좋지만, 제주도 갈 때는 기사도 한 명 필요하잖아. 운전기사. 그래서, 내가 급섭외했지."
"아! 제가 같이 가는 줄 모르셨구나. 불편하시면..."
오랜만에 만나니, 선우가 또 존대를 해 왔다.
"뭐야? 웬 존대? 이제 둘이 같이 교사연구회 안 해?"
민아가 천연덕스럽게 물어왔다.
"아, 그건 이미 작년 겨울에 끝났지. 오랜만이에요. 선우 씨. 이렇게 뵙게 돼서 놀라긴 했지만, 불편한 건 아니에요."
"아~, 난 왜 그 연구회가 존재하지 않았던 거 같지? 하하하. 여튼, 이 멤버로 한번 뭉치고 싶었어, 난. 언니도 괜찮지?"
"어...? 그래."
뜻하지 않게 함께 하게 된 선우가 조금은 어색해도 불편한 것은 아니었다. 늘 그렇듯이 언제나 기다려주고, 귀 기울여 들어주고, 기꺼이 함께 해 주는 사람이기에.
"그럼, 2주 후 8/3(화)~8/6(금) 이렇게로 진행하는 거야. 특별하게 가고 싶은 데 있으면 말해봐."
어릴 적 가족끼리 여행을 많이 다녔다는 민아는 코스 짜는 데도 척척 능수능란했다. 유명 관광지를 가까운 권역으로 묶고, 그 권역 내에 맛집을 끼우고, 카페를 끼우면서 볼거리와 먹거리를 만족시키는 여행지를 척척 짜 맞추어 나갔다. 선우도 적당한 호응으로 민아가 더 신나게 계획하도록 여행 계획을 거들었다.
"음, 요즘 SNS 보면 바다 보이는 수영장 좋던데, 인피니티풀인가? 그런 수영장 있는 숙소는 비싸겠지?"
연희가 꿈꿔왔던 숙소를 이야기해 보았다.
"비싼 곳도 있겠지만, 제주도라면 4성급 호텔만 가도 그런 수영장 있어. 5성급은 우리한테 좀 부담이겠지만, 4성급 호텔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아! 자동차 렌털은 내가 알아서 할께. 부담 갖지 말고, 숙소 정해. 어차피 방 2개 구해야 되는 거 아냐?"
"운전기사 시키는 것만도 미안한데, 선배가 렌탈비를 부담하는 건 좀..."
"이번에 내가 타보고 싶었던 차 한번 몰아보고 싶어서... 순전히 내 만족을 위한 거니까, 차는 신경 쓰지 말고, 숙소 경비만 신경 써. 내 방값은 내가 낼 테니까."
"우와, 선배 갑자기 좀 달라 보여. 하하."
"그래도, 돼요? 어떤 차를 빌리려는 지 모르겠지만, 차 렌탈비도 만만찮을 텐데, 같이 1/n 해요."
"아니에요. 이렇게 안 끼워주면, 혼자 갔어도 들었을 비용입니다. 같이 동행할 수 있음이 제가 더 기쁜 걸요."
"그럼, 선배 비행기 비용은 우리가 처리할께. 그렇게 하자. 그래야 우리도 맘 편하게 선배 부리지. 하하하."
"그래, 그럼 그렇게 해. 이대로 노예 계약을 맺자. 정말 맘 편하게 막 대해줘."
"하하. 알았어, 그런 건 내가 자신 있어."
격의 없는 대화 속에 벌써 여행을 시작한 듯 셋은 들떴다. 7월 말의 공기는 바로 코앞의 공기를 마시는 것조차 턱턱 숨 막히게 하는 묵직한 공기였지만, 카페 안의 청춘들이 내뿜는 열정은 상큼했다. 마치, 죽은 듯 가지만 앙상하던 나무가 싹을 피우게 하는 봄기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