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에 피는 수국처럼...
#17. 토요일, 저녁 7시
남편의 병세가 전혀 호전이 되지 않자, 병원비 때문이라도 김여사는 일을 계속하려 했다.
봄이 되어 연희가 개학을 하자 김여사는 주말만 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호텔 미용실에서 예식머리를 담당하는 미용 일자리를 구했다.
5월이 되니 주말 결혼식이 제법 많아져서, 주말만 일함에도 그 수입이 솔찮게 괜찮았다. 그래서, 연희에게 미안해도 주말에는 병원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5월에서 6월로 날씨가 뜨거워질수록, 김여사는 일터에서 여유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예식 머리가 끝나고 미용실을 정리할 때면, 이제는 제법 미용실 식구들과도 친해져서, 김여사는 미용실 동료들과 가정사까지도 나누게 되었다.
남편의 뒷바라지하는 김여사와 연희에게 애틋한 시선으로 위로해 주는 동료들이 많았지만, 그 누구보다도 비슷한 연배인 미용실 원장과 가장 마음이 잘 통했다.
"어휴, 난 울 신랑이 갑자기 교통사고로 죽고 나서 얼마나 막막했는데... 평생 돈 벌어본 적 없던 사람이라 어린 아들 보면서 몇 날 며칠을 울기만 했었는 데, 어느 날 울 아들이 그러더라고. 엄마, 나 배고파, 언제까지 울꺼야? 그 말에 내가 정신이 번쩍 든 거야."
"글쵸. 나 혼자면, 몇 날 며칠을 이불 베개 다 적셔가며 울고만 있어도 괜찮지만, 애가 있으면 그게 또 쉽지 않죠."
"글치, 울 아들이 내 정신 차리게 만든 거지... 운다고 밥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난 굶어도 자식은 무슨 죄야? 내가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든 거야."
"여튼, 그놈이 효자네요. 지 엄마 살렸네."
"글치. 그 넘 때문에 정신 차리고 보니, 남편이 들었던 보험이 생각나더라고... 울 신랑이 살아생전에 젤 잘한 일이지. 보험 많이 넣을 때는 왜 그런데 돈 쓰냐고 막 잔소리하고 그랬었는 데... 그게 이렇게 쓰이게 될 줄이야. 가게 하나 낼 돈은 되더라고... 그래서, 기술 배우는 게 쉽지는 않았지만, 가게는 쉽게 낼 수 있었네."
"남편 분이 현명하셨네요."
"현명했던 건지, 지 팔자 그럴 줄 알았던 건지... 여튼, 기술 배우고, 가게 차리고, 사람들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 듣고 하니까 이팔청춘에 과부 됐어도, 또 그렇게 세월이 가고 살아지더라."
"그렇게 혼자 있으면 또 결혼하자고 들러붙는 사람은 없었어요?"
"왜 없었겠어? 사실, 보시다시피 내 인물은 걍 평범하잖아. 돈 냄새가 나는 거지... 남자들 몇몇 붙긴 하던데, 아들 보니까 쉽게 못 만나겠더라고... 이 가게는 울 신랑 목숨값인 데, 내 가진 건 울 아들 줘야지. 외간 남자들과 나눌 수는 없잖어."
"뭐, 돈보고 왔겠어요? 원장님, 맘 좋으니까 그 맘씨 보고 왔겠죠?"
"그럴까? 근데, 이상하게도 내 눈에는 다들 엉뚱한 데 관심 있는 것처럼 의심스럽더라고. 그래서, 오늘날까지 혼자. 아마, 더 늙어도 내 팔자에 더 이상 남자는 없을 꺼야."
"호호호. 아직, 건강하신 데, 안 외로워요?"
"아들 있잖어. 아들."
"아들 장가가면요? 장가 안 보낼꺼에요?"
"그러면, 또 여기 미용실도 있고... 자기, 나 보러 평일에도 자주 놀러 올 꺼 아냐? 하하."
"싫은 데요? 호호, 전 신랑도 있고 딸도 있어서요. 호호호"
원장의 과부 된 이야기를 들으며, 김여사는 인생을 생각했다. 사연 없는 인생이 없고, 생채기 하나 없는 멀쩡한 인생은 없다고. 우리네 인생은 다 고만고만해서 특별나게 잘 사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의 인생도 현미경으로 보듯 그 인생 가까이에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국은 고난의 굴곡과 상처로 얼룩진 삶이라는 것에 위안을 얻었다. 원장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평일에 병원에만 묶여 있는 자신의 인생이 억울하지도 별로 불쌍하지도 않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호텔 주변 화단에는 수국이 연한 자줏빛에서 하늘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수국의 색이 바뀌듯 김여사 자신의 인생도 색만 바뀌고 있을 뿐, 여전히 피어있는 꽃이라 생각했다. 그 인생은 연희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색만 바뀐 채로 여전히 피어있는 꽃, 수국처럼 연희의 사랑도 그러했다.
연희가 잠들려고 하는 데, 또 쿵쾅쿵쾅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니야? 여니야?"
징그러운 소리가 또 들려왔다. 이젠 정말 연희가 불안할 지경이었다. 지난번처럼 또 기준의 그녀를 불러야 할 지경이 되면 그녀가 뭔가 이상하게 오해할 수 있을 거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 선배는 왜 자꾸 저러는 거야? 뭐라, 말하기도 쉽지 않은 데..."
기준이 대문밖에서 술의 환영과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을 때, 연희는 방의 불을 껀채로 조용히 숨죽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집에 불이 꺼져 있어서인지, 이내 기준의 소리는 줄어들고, 골목길의 시끄러운 소리에 위협감을 느낀 옆집 개가 왈왈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또, 길거리에서 잠든 건가?'
숨죽여 계속 가만히 있어보았다. 30분이 지났을까? 여전히 소리가 없었다. 이제는 가버린 건지, 지난번처럼 또 잠이 든 건지 미운데도 모른척할 수가 없어서 슬리퍼를 끌고 대문 앞으로 살금살금 다가가 보았다.
아뿔싸~
골격이 큰 기준이 오늘도 대문에 기대어 고개를 떨구고 두 다리를 브이자로 뻗은 채 그렁그렁 코를 골며 잠을 자고 있었다. 그녀에게 또 연락을 해야 될 것 같았다.
한 번은 그냥 지나갔겠지만, 또 전화를 하면 둘의 관계를 의심받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렇다고, 연희 집에 재울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뭔가 의심을 받더라도, 기준 본인 집에서 자게 하는 것이 가장 최선의 방법 같았다. 힘겹지만, 오늘 또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 응, 자기야.
전화기 건너편에서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정함이 넘치는 그 목소리에 연희는 용기를 잃고서, 우물쭈물했다. 전화를 걸고서 말이 없자, 그녀는 조금 놀란 듯했다.
- 자기야, 자기야? 또, 술 마셨어?
"아, 사실..."
연희의 목소리에 그녀는 뭔가를 직감한 듯했다.
- 아! 거기 어딘가요?
"네, 지난번 한번 오셨던 곳인데, 다시 주소 찍어 보내 드릴게요."
- 네. 죄송합니다. 빨리 갈게요.
그녀가 오늘도 그를 데리러 왔다. 이제는 제법 자연스럽게 연희도 거들어 기준을 부축했다.
"아, 대체 여긴 또 왜 온 거야?"
그녀의 짜증 섞인 혼잣말이 들려왔다. 아직 연희의 존재는 모르는 거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되었지만, 기준을 어찌 조심시켜야 될지 막막해졌다. 이제는 연희가 나서서 뭐라 할 관계도 전혀 되지 않아서 더 당혹스러웠다.
연희의 도움으로 겨우 기준을 차에 실은 그녀는 고맙다는 간결한 인사 한마디를 남기고선 얼른 그곳을 벗어났다.
습관이란 게 무서운 것인가? 무의식이란 게 무서운 것인가? 분명, 제정신이었으면, 하지 않을 실수를 하는 기준이 자꾸만 안쓰러웠다. 그 실수가 연희 자신 때문인 거 같아서... 아직도,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것 같아서... 아직도, 자신에게 미안해하고 있는 것 같아서... 그래서, 연희도 아직 기준을 잊지 못했다. 둘은 헤어졌고, 기준은 결혼을 했고, 앞으로도 절대로 그 관계에 어떤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연희는 기준을 미워하기는커녕, 잊지를 못했다.
이런 밤이면, 어김없이 선우가 떠올랐다. 기준을 잊어 보겠다고 화풀이하듯 만난 사람도 선우이고, 기준을 잠시라도 잊도록 도와준 사람도 선우고, 기준과 연관될 때마다, 기준이 자신을 떠나갈 때만큼 더없이 비참했던 순간에도 찾은 사람이 선우였으니까...
더는 선우에게 신세를 질 수 없음을 알면서도, 마음으로 의지하는 건지, 몸으로 의지하는 건지 혼동스러울 정도로 선우를 떠올렸다.
'전화를 한 번 해볼까?'
폰을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사귈 마음도 아니면서, 자꾸만 그를 떠올리는 까닭을 연희 자신도 알 수가 없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