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년 동안은 날마다 회사에 가기 싫었지만 유난히 가기 싫은 날이 있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다. 화장대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 유난히 무표정하게 보이는 날...
피곤에 찌든 무표정한 얼굴을 화장으로 가려보려 하지만 표정까지 감출 순 없었다. 이젠 가슴까지 꽉 막힌 느낌이다. 어쩌지... 회사에 안 갈 수도 없고... 일단 출근은 해야겠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무거운 몸을 이끌고 회사에 갔다.
자리에 앉았는데 이상하게 계속 어지럽고 속도 울렁거린다. 더 이상 못 참겠다. 일단 오늘 꼭 처리해야 하는 일들만 끝내 놓고 병원에 간다고 하고 조퇴를 했다. 거짓말은 아니다. 안 그래도 불면증 때문에 잠을 못 잤는데, 요즘 며칠 동안은 밤새 1시간 간격으로 화장실에 가느라 잠을 통 잘 수가 없었다. 전에도 밤에 잠이 유난히 안 오는 날은 신경이 예민해져서 아주 작은 요의에도 화장실을 몇 번씩이나 갈 때가 있었지만 이번처럼 이렇게 오래 지속된 건 처음이다.
병원에 가서 증상을 얘기하니 신장에 염증이 있을 수 있고 그게 아니라면 과민성 방광증상일 수 있다면서 일단 소변검사부터 하잔다. 낮에는 너무 멀쩡한데다 다른 증상도 전혀 없으니 방광염이 아닐 건 알지만 혹시 모르니 검사는 해봐야 할 것 같았다. 10여분 만에 검사 결과가 나왔으나 역시 예상대로 염증은 없었다. 그렇다면 스트레스로 인한 과민성 방광? 암튼 과민성 방광증상을 개선해 준다는 약이랑 불면증 치료를 위한 수면진정제를 처방받았다.
당장이라도 내 방 침대에 눕고 싶었지만 집으로 들어가기엔너무 환한 대낮이다. 게다가 지금 집에 가면 무슨 일로 조퇴까지 하고 왔는지 부모님이 물어볼게 뻔하고, 걱정시키긴 싫지만 그렇다고 거짓말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카페에 가서 책이라도 읽으면서 울적한 마음부터 달래보기로 했다. 몸과 마음은 이렇게 엉망진창인데 주책맞게 귀신같이 때를 맞춰 배꼽시계가 울린다. 어쩌지? 카페에 가서 간단히 베이글이라도 시켜먹을까? 음... 차는 혼자 마실 수 있는데 혼자 빵까지 먹기엔 뭔가 좀... 내키지 않았다. 김밥을 사서 차 안에서 먹어야겠다. 일단 동선상 가까운 병원 건너편에 있는 편의점부터 갔다. 로또부터 사고(요즘 나의 유일한 희망), 집에 맥주가 떨어졌길래 4캔에 만원 하는 맥주도 사고(물론 오늘 마실 건 아니다), 다시 횡단보도를 건너 김밥 한 줄을 샀다. 사면서도 한 줄을 살지 두 줄을 살지 잠깐 고민했다. 평소대로라면 내게 한 줄은 좀 적고 두 줄은 많다. 1.5줄은 없으니 그리고 난 아파서 조퇴를 한거니까 한 줄만 사기로 한다.
옛날 mp3를 연결해 음악을 켜고 창문을 반쯤 연 채 자주 가는 대청댐 뒷길로 향했다. 햇볕은 따가웠으나 바람은 시원했다. 가는 길에 잠깐 차를 세우고 김밥을 먹었다. 역시 김밥 한 줄은 양에 차지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초록 초록한 길을 따라 30여분을 더 달려 카페에 도착했다.
평일 낮이라 사람이 없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한가하진 않았다. 지난 주말에 왔을 때 사람이 많아서 못 앉았던 창가 자리에 앉고 싶은데 이미 아주머니 두 분이 선점하셨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어서 아주머니들 옆 옆 자리를 비지고 앉았으나 책을 읽기엔 두 분의 목소리가 너무 크다. 할 수 없이 아무도 없는 야외석에 앉았는데 덥지도 않고 조용하고 생각보다 괜찮았다.
새콤 시원한 레모네이드 한 모금에 책이 몇 장씩 넘어간다. 신기하게도 책이 잘 읽힌다.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생의 한때에 자신이 캄캄한 암흑 속에 매장되었다고 느끼는 순간이 있다. 그러나 사실 그때 우리는 어둠의 층에 매장된 것이 아니라 파종된 것이다. 세상이 자신을 매장시킨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을 파종으로 바꾸는 것은 우리 자신이다. 매장이 아닌 파종을 받아들인다면 불행은 이야기의 끝이 아니다.
올해 들어 내가 너무 힘들어 보였는지 회사 부장님이 읽어보라며 선물해주신 책인데 그땐 지금보다 상태가 더 나쁠 때라 급한 마음에 하루 만에 읽긴 했지만 그때뿐 내용은 다 잊었었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나 다시 읽으니 글자 하나하나 구절 하나하나가 꼭꼭 마음에 박힌다.
그래! 맞아. 맞아...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책을 읽어내려간다. 지금 이 마음 그대로라면 마음이 좀 단단해질 것도 같은데, 앞으로 힘을 내서 잘 버텨나갈 수 있을 것도같은데 뭐가 날 이렇게 힘들게 하는지 아직은 자신이 없다.
햇살은 따뜻하고 바람은 솔솔 불고, 보조댐 옆이라 물소리가 백색소음처럼 이어지니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아님 약봉지 속에 들어있는 수면제가 먹기도 전에 심리적인 약효가 나타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잠깐 엎드려 졸다가 책을 읽다가 또 물을 바라보며 멍을 때리다 보니 한나절이 지났다. 이러다간 못 일어날 것 같아서 정신을 차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 조퇴를 한 후, 내 동선을 보면 병원 들른 것 빼곤 다 땡땡이로 의심받을만하다. 하지만 난 절대 땡땡이가 아니다. 난 마음이 아파서 조퇴를 한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