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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 셜리 Oct 28. 2019

낯선 나라 낯선 처마 밑에서 비를 긋다

말없이 배시시 웃던 그 남자

2019년 7월 28일  다낭

오늘은 다낭을 떠나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 시간상으론 새벽 1시 30분 비행기니까 엄밀히 말하면 떠나는 날은 내일이다. 암튼 오늘은 쇼핑 말고는 특별한 일정이 없어서 오랜만에 늦잠을 자고 여유 있게 조식을 먹은 후 늦게 체크아웃을 하기로 했다.

조식이 10시 30분까지라 늦잠의 마지노선을 9시로 정해놓고 설마 그 시간에는 일어나겠지 하면서도 혹시 몰라 9시 알람을 맞춰 났는데 정신없이 자다가 알람 소리를 듣고서야 겨우 일어났다. 알람이 없었다면 아마 체크아웃 시간 맞추기도 빠듯했을 거다.

'그럼  안 되지~! 이런 호텔에선 조식을 꼭 먹어줘야지!' 부랴부랴 씻고 식당으로 내려갔더니 그 시간에도 사람이 많다. 조식이 끝나는 시간까지 꽉 채워서 배부르게 먹고 11시 50분에 체크아웃을 했다.

딱히 갈 데가 없는 우린 어딜 갈까 고민하다가 짐은 호텔에 맡겨두고 호텔 셔틀버스를 타고(이 호텔에 짐도 맡기고 셔틀도 세 번이나 타고 아주 뽕을 뽑았다) 참뮤지엄으로 갔는데(실내 박물관이니 당연히 에어컨이 빵빵할 줄 알고... ㅠㅠ) 실내는 실내인데 야외보다 더 더운 실내다. 에어컨은 있으나 틀지를 않았고 그 넓은 공간을 몇 대의 선풍기로 의지하고 있으니 이건 있으나 마나이다. 박물관의 많은 조각품들도 문화재도 날씨가 더우니 감흥이 없다. 평소엔 인공적인 바람이 싫다며 피해 다니는 선풍기를 오늘은 애인이나 되는 듯 선풍기 바람만 쫓아다녔다.

안 되겠다! 더 이상 여기서 버티기 어렵다고 판단한 우린 입장료가 없으면서도 시원한 미술관이랑 근처에 있다는 까오다이교에 가기로 했다. 그런데 그랩을 불렀더니 픽업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오다가 중간에 기사님이 취소를 하기도 하는 등 거리가 가까워 돈이 얼마 안 돼서 그런지 그랩이 잡히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까오다이교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걸어서 10분. 평소라면 결코 힘든 거리는 아닌데 날씨도 덥고 길도 불편해서 가는 길이 힘들었다. 그런데 어렵게 도착한 까오다이교는 달랑 작은 건물이 다였고 그나마 불까지 꺼져있어 썰렁했다. 안에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밖에서만 서성이다 나왔다. 여행책자 지도에 가깝다고 돼 있는 미술관을 구글로 검색했더니 1.4킬로~ 지도상으론 바로 옆에 있었는데 뭔 이런 어이없는 일이... 여행책자만 믿은 게 잘못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고 우왕좌왕하는데 갑자기 빗방울이 커지더니 장대 같은 비가 쏟아진다. 남의 가게에 들어가 있기는 좀 그래서 나무 밑으로 가 비를 피하려고 했더니 가게 안에 있던 젊은 남자가 수줍게 웃으며 가게 안에 들어오라는 손짓을 한다. 베트남 남자들은 말도 없고 무뚝뚝하지만 뭔가 정이 느껴진다. 옛날 경상도 남자 스타일? 그렇게 우린  배시시 웃던 남자의 가게에서 비를 피하기로 했다. 미술관까지 그랩을 몇 번이나 불렀으나 아까처럼 픽업 대기시간이 엄청 길어지고 중간에 기사가 취소도 하고...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 결국 미술관은 포기하고 한시장까지 그랩을 불러놓고 기다리고 있는데 낯선 타국 낯선 가게 밑에서 비 내리는 걸 보고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한참만에 그랩을 잡고 한시장까지 가니 언제 비가 왔냐는 듯 하늘이 파래졌다. 급 피곤이 몰려와 한시장 근처 카페에 가서 땀도 좀 식히고 쉬기로 했다. 시원한 에어컨 속에 있으니 금세 컨디션이 좋아진다. 길거리 호객꾼들이 했던 "언니~! 에어컨 빵빵~!" 이 말이 얼마나 중요한 말인지 이제야 깨달았다. 1시간 정도 천국을 누리다가 한시장으로 갔다. 여전히 한국사람들로 바글바글... 금은방에 가서 환전을 하고 시장에 가서 물건을 고르는데 상인들의 장사 수완이 보통이 아니다. 여기선 베트남 말도 영어도 필요 없고 짤막한 한국말(즉 반말)만 하면 다 통한다. 귀신같이 자기들이 필요한 말들은 한국말로 참 잘한다. 베트남이 물가가 싸단 말은 다 거짓말이다. 적어도 관광지에서는 말이다. 생수도 천 원, 아이스크림도 싼 게 천 원... 싼 게 하나도 없는 느낌이다. 아주 돈 잡아먹는 귀신이다. 호갱이었는지 아니었지는 모르겠으나 정신없는 와중에 망고젤리랑 마그네틱, 라탄백을 간신히 사서 나왔다.

다시 참박물관으로 가서 셔틀을 타고 호텔로 돌아가 짐을 찾아 물건을 정리하고 다시 셔틀을 타고 롯데마트로 갔다. 호텔에서 늦게 조식을 먹은 게 다라 지난번에 갔던 한국식당에 가서 비빔밥이랑 떡볶이를 먹었는데 떡볶이는 떡의 식감이 좀 흐물거리긴 했으나 하나도 남김없이 맛있게 먹었다. 지난번에 마트에 왔을 때 살 거리를 찾아봤었는데 가격은 비싸고 다 한국에 있는 물건이라 사지 말아야지 다짐을 했건만 나의 물욕은 그리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예쁜 장지갑이랑 동전지갑을 잔뜩 사고 나는 먹지도 못 하는 코코넛 커피(이것도 비싸다)랑 나를 위한 스민, 연잎, 이름 모를 허브차도 샀다.

새벽 비행기 시간까지 어떻게 기다리나 했더니 벌써 9시가 넘었다. 마트 밖으로 나가니 택시기사님들이 먹잇감을 쫓는 맹수들처럼 우릴 둘러싸고 그랩이랑 똑같다며 우리가 그랩을 실행하는 걸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 심지어 자기가 먼저라며 우리 옆으로 일렬로 줄까지 선다. 그러다 목적지로 공항을 찍고 요금이 7만 5 천동밖에 안 되는 걸 보더니만 다들 쥐도 새도 모르게 스르륵 사라진다. 그 모습이 어찌나 웃기던지 자꾸 웃음이 새어 나왔다.

다시 한참을 기다려 그랩 아저씨가 왔다. 공항이 생각보다 가까운 거리라 다들 꺼려하는데 와주신 아저씨가 고마웠다. 공항으로 가는 길에 우리가 갔던 많은 곳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고 여전히 다낭의 야경은 아름다웠다. 이젠 진짜 안녕이구나. 마지막이라 그런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베트남 노래도 슬프게 들리고 지친 얼굴의 기사 아저씨도 왠지 짠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7만 5 천동만 주면 되지만 11만 동이나 드렸다. 돈을 드렸더니 아저씨 눈이 순간 똥그래진다. 더 드렸다고 해도 우리나라 돈으로 몇 천 원 안되는데 그렇게 놀라며 좋아하시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베트남 돈을 면세점에서 탈탈 털고 길고 긴 대기시간을 지나 비행기를 타고 공항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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