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앤 셜리 Aug 10. 2020

호카곶! 콩나물시루 버스를 타도 가보길 잘했어

episode-2020. 1.21. 포르투갈 신트라&호카곶

이 여행기는 코로나 19가 확산되기 전에 다녀온 이야기입니다.

시차 적응을 한 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포르투갈 6일 차 시차 적응 실패! 눈이 번쩍 떠져서 시간을 보니 새벽 3시. 난 대체 언제 시차적 응이 되는 거니~

아이러니한 건 잠은 못 자도 조식은 잘도 넘어간다는 거다. 이번 리스본 호텔은 포르투보다 조식이 훨씬 다양하고 맛있어서 더 많이 먹었다. 이러니 그렇게 많이 걷고도 살이 찌지...


오늘은 리스본 근교에 있는 신트라와 호카곶에 가는 날이다. 메트로를 타고 호시우 역으로 가서 신트라 원데이패스(리스본-신트라-카스카이스-호카곶 왕복 기차와 이 도시 안에서 버스비가 무료)를 구입하고, 신트라행 기차를 타고 40분을 달려 신트라 역에 도착했다. 먼저 역 앞에서 버스를 타고 페나성으로 갔다. 원래는 제로니무스 수도사들이 명상을 위해 머물렀던 작은 수도원이었다는데, 페르난도 2세 부부가 이 곳을 보고 한눈에 반해 부서진 수도원 자리에 여름 별궁으로 완성한 것이 페나성이다. 사진에서 봤던 것처럼 성이 노랗고 파랗다. 높이 있어서 전망도 좋다. 색감이 예뻐서 어디든 사진을 찍으면 예쁠 것 같았지만 주말이라 그런지 사람이 워낙 많아서 예쁜 사진은 건지지 못했다. 꽃과 나무를 좋아해서 정원을 보려고 궁전이랑 정원 통합권을 샀으나 무슨 정원을 그리 멀리에다 만들어 놨는지 걸어가기엔 너무 멀기도 하고 시간도 많지 않아 아쉽지만 포기했다.

다음으로 버스를 타고 신트라 왕궁으로 갔다. 겉보기엔 여기가 왕궁이 맞나? 싶을 정도로 작고 소박해 보였다. 신트라 왕궁은 리스본의 더위로부터 탈출하거나 사냥을 위해 왕실 가족들이 머물던 곳이란다. 포르투갈을 대표하는 푸른색의 아줄레주로 장식된 벽과 72개의 촛불을 밝혔던 샹들리에가 달린 무도회장이 제일 유명한 볼거리다. 그동안 너무 크고 화려한 궁전을 많이 봐서 큰 감흥은 없었으나, 미로 같은 구조에 다양한 모습이 숨어있어서 매력적이었고, 특히 테라스에서 보는 전망은 너무 멋졌다. 테라스에서 미국에서 오셨다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만나 두 분 사진을 찍어드렸는데, 몸이 불편한 할머니를 할아버지가 손을 꼭 잡고 함께 다니시는 모습이 아름다워 보였다.

배가 고파 왕궁 근처에 있는 식당에 가서 치킨 덮밥과 포르투갈식 스테이크를 시켰는데, 분명 노멀한 스테이크라 했는데 뭔가 간장 간이 되어 있는 듯한 맛이 나는 전혀 노멀하지 않은 스테이크가 나왔다. 그래도 먹을 만은 했는데, 스테이크를 다 먹을 동안 치킨 덮밥이 안 나와서 이상하다 하며 계속 기다렸는데 주문이 잘못된 건지 '피니쉬?'라고 묻는다. 어? 근데 먹고 보니 스테이크 하나로도 배가 불러서(이 나라는 음식 양이 기본 1.5인분은 되는 것 같다)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예스! 피니쉬!~' 오~ 돈 굳었네~ ㅎㅎ


버스를 타고 갈까 하다가 언제 올지 알 수가 없어서 산책 겸 걸어서 헤갈레이라 별장으로 갔다. 이 곳은 큰돈을 번 브라질 출신의 사업가가 지은 여름 별장이라는데 규모가 상당하다. 지금은 신트라 시가 인수해서 대중에게 공개됐다는데 입장료를 10유로나 받는다. 왕궁도 아닌데 비싸다. 넓은 정원에 폭포, 지하동굴, 우물, 전망대, 연못, 예배당, 독특한 양식의 별장이 있다. 생각 보나 넓어서 제대로 보려면 2시간은 걸릴 것 같다. 우린 호카곶까지 갔다가 가야 해서 서둘러 돌아보고 나왔다.

호카곶에 가려면 신트라 역으로 가서 다시 버스를 타고 가야 하는데 신트라 역으로 가는 버스가 안 온다. 버스정류장에 쓰여있는 시간표의 시간이 훨씬 지났는데도 안 온다. 1시간 가까이 기다리다 이러다간 호카곶을 못 가게 될 것 같아서 호카곶을 포기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고민하다, 호카곶을 포기하기엔 나중에 후회가 남을 것 같아서 버스 기다리기를 포기하고 20분을 걸어서 역으로 갔다. 차라리 진작에 걸어갈 것을... 다행히 호카곶 가는 버스가 바로 있어서 50분 정도 버스를 타고 호카곶에 도착했다. 도착하니 해가 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유라시아 대륙의 최서단이라고는 하지만 의미를 부여하니까 그럴듯해 보이는 거지, 그냥 바다지 뭐 별게 있겠어?라고만 생각했는데, 해질녘이라 주황색으로 물들어가는 하늘과 십자가 기념비를 중심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실루엣이 너무 아름다웠다. 사람들은 땅끝에 걸터앉아 망망대해 위로 지는 태양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나도 거기에 한없이 그렇게 앉아있고 싶었다.

그러나 돌아가는 버스는 1시간 간격으로 있고 우리가 내릴 때 보니 이미 버스를 기다리는 줄이 엄청 길었다. 우린 버스를 타고 신트라 역까지 1시간여를 가서 또 리스본 가는 기차를 타야 하니 마음이 급했다. 이번 버스를 못 타면 시간이 너무 늦어져서 깜깜해질테고, 밤늦게까지 돌아 니는 건 너무 힘들 것 같아서 말도 안 되지만 노을 지는 모습을 딱 10분만 보고 버스 줄을 섰다. 이미 줄이 길어서 탈 수 있으려나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버스가 오자마자 줄이 와르르 무너지고 어디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나타난 건지 순식간에 사람들이 좀비 떼처럼 몰려와 앞문, 뒷문으로 버스 카드 태그도 없이 올라타기 시작한다. 잠시 상황판단이 안 돼서 멍 때리고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우리가 거의 마지막으로 뒷문에 올라탔다. 학창 시절에도 타본 적 없는 콩나물시루처럼 빽빽한 버스. 어디 잡을 곳도, 발 디딜 틈도 없다. 그 상태로 서서 40여분을 가니 식은땀이 나고 숨이 막힌다. 어지러워 쓰러질 것 같았다. 이러다 정말 쓰러지겠다 싶은 딱! 그때, 신트라 역에 도착했다.


신트라 역에서 리스본까지 가는 기차 안에서 거의 쓰러진 채로 1시간을 버텨 리스본에 도착했다. 이 상태로 호텔까지 가는 것도 무리다 싶어서 기진맥진한 몸으로 한식당을 찾아갔다. 한식을 먹으면 힘이 날 것 같았다. 다 먹고 싶었지만 순두부찌개와 돌솥비빔밥을 시켰다. 조금 짜긴 했지만 맛있게 남김없이 다 먹었다. 그리고 정말 신기하게도 힘이 났다.


호텔에 가려면 메트로 카드를 충전해야 돼서 발권기에 카드를 넣고 충전을 하려는데 친구가 엉뚱한 포르투 카드를 넣어서(사실 리스본 카드나 포르투 카드나 생긴 게 비슷하긴 하다) 헤매고 있었더니 키 큰 흑인 남자가 다가와 싱긋 웃으며 자기가 도와주겠단다. '어라? 이건 인터넷에서 많이 본 삥 뜯기 기술인데?' 메트로 티켓 사는 걸 도와주는 척하고 돈을 요구하는 수법! 이미 수법을 알고 있었지만 거절할 새도 없이 티켓을 착착 뽑아준다. 그리고는 예상대로 웃으며 푼돈을 요구한다. 몇 초 도와준 대가로 2유로를 줄 순 없어서 1유로를 줬는데 그것도 고마워한다. 어쨌든 이 사람 아니었으면 한참을 헤맸을 테니 이만하면 윈윈이다라고 생각하며 뒤돌아 가는데 헐레벌떡 뛰어와 동전 몇 개를 내민다. 정신없어서 카드를 충전하고 남은 동전을 그대로 두고 왔는데 가져가라며 챙겨 온 거다. 이건 뭐지? 일한 만큼만 돈을 받는다는 건가? 아님 자기들도 이 정도의 양심은 있다는 건가? 암튼 생각 외로 양심적인 사람이었다. 얼마 안 되는 동전을 가지라고 하니 또 싱긋 웃으며 돌아선다.


아... 오늘은 너무너무 힘든 하루였다. 쓰러질 만큼 아니 죽을 만큼 힘들었지만 그래도 호카곶을 안 갔으면 평생 후회했을 것 같다. 지금이 아니면 다신 갈 수 없을 것을 잘 알기에... 잠깐이었지만 충분히 아름답고 감동적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가 계단 앞에서 반찬 가방을 집어던진 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