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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 셜리 Aug 08. 2020

그가 계단 앞에서 반찬 가방을 집어던진 건

episode-2020. 1. 20.  포르투갈 리스본

이 여행기는 코로나 19가 확산되기 전에 다녀온 이야기입니다.

오늘은 정든 포르투를 떠나 리스본으로 가는 날이자 포르투갈에 온 지 5일 만에 시차적 응이 되기 시작한 날이다. 리스본에 가려면 깜파냥역에 가서 기차를 타야 해서 혹시 몰라 알람을 맞춰놓고 잤는데, 이게 웬일! 그동안 매일 새벽 2~3시쯤 항상 잠이 깨서, 당연히 새벽인 줄 알고 더 자려고 했더니 6시 20분으로 맞춰놓은 알람이 우렁차게 울렸다. 일찍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오히려 아침잠이 쏟아지는 이상한 현상... 어찌 됐건 사람의 심리는 신체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주는 게 분명하다. 참 신기하고도 이상하다. 암튼 여기 와서 처음으로 세상모르고 단잠을 잔 것 같다. 아침을 먹고 짐 정리를 하는데, 역시나 가방이 터져나간다. 앞으로 뭘 더 살 생각은 안 해야겠다.


4일 만에 체크아웃을 하고 너무나 익숙한 상 벤투 역으로 갔다. 티켓 창구에서 깜파냥역까지 가는 티켓을 사려고 했더니 어디에 가느냐고 묻는다. 리스본에 간다고 했더니 리스본 기차 티켓이 있으면 깜파냥역까지는 무료란다. 그도 그럴 것이 여기서 깜파냥역까지는 한 정거장밖에 안된다. 깜파냥역에 도착해서 리스본행 기차에 올랐다. 캐리어를 짐칸에 실으면서 유럽엔 도둑이 많으니 조심해야 한다며 캐리어에 자전거 자물쇠를 채워서 기둥에 묶어놨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만 자물쇠까지는 아무래도 오버였나 보다. 나중에 내릴 때 보니 우리만 자물쇠를 채워놔서 좀 민망했다. 기차는 9시 40분 정시에 출발했다. 정차역 안내방송이 잘 안 들려서 티켓에 찍혀있는 도착 예정 시간만 보고 있었는데, 도착할 때가 다 됐는데도 속도를 줄일 생각을 안 하고 쌩하고 지나간다. 혹시 지나쳤나 싶어서 구글맵 찾아보니 아직 32킬로나 남았다. 연착인가 보다. 그렇게 20분을 더 가서 1시쯤 리스본에 도착했다. 근데 걱정할 필요가 없었던 게, 여기가 종착역이었다.

리스보아 카드는 리스본 투어 하는 날 사기로 하고 지하로 내려가 티켓 머신으로 1일 교통권을 사려는데 아무리 해도 안 된다. 이것저것 눌러보다 겨우겨우 1일권을 사서 지하철을 타러 갔는데 역사가 마치 오래된 탄광 같다. 진짜 오래된 느낌이다. 목적지에 도착해서 지상으로 올라가려는데 계단이 수십? 아니 수백 개? 쯤 되어 보인다. 하필이면 여긴 에스컬레이터도 없다. 무거운 캐리어를 들고 계단을 올라가려니 힘들어 죽을 것 같다. 예전에 TV에서 봤던 '꽃보다 청춘'의 백일섭 아저씨 마음이 백 번 이해가 갔다. 그가 계단 앞에서 반찬 가방을 집어던진  그냥 투정이 아니었다. 그가 참을성 없는 투덜이라서 그런것도 아니었다. 나 역시 그처럼 캐리어를 계단 밑으로 확! 굴려버리고 싶었다.


간신히 정신줄을 꼭 붙들고 낑낑거리며 캐리어를 질질 끌고 호텔에 도착했다. 잠시 쉬었다가 버거킹에 가서 와퍼주니어 세트를(여긴 와퍼주니어가 일반 와퍼만큼 크다) 먹고 메트로를 타고 전망이 예쁘다는 산타 주스타 엘리베이터로 갔다. 가보니 줄이 엄청 길었다. 리스보아 카드나 1일권이 있으면 무료라더니 엘리베이터까지 무료인 거고 계단으로 옥상 전망대까지 가려면 1.5유로를 더 내야 했다. 얍삽하네~ 올라가 보니 과연 전망은 좋았다. 멀리 파란 바다가 보이고 흰 벽에 빨간 지붕의 집들이 한눈에 펼쳐진다. 멋지긴 한데, 바람이 장난 아니다. 인물사진은 찍을 수도 없다. 머리가 미친* 산발이다.

바람 때문에 오래 있을 수가 없어서 바로 내려와 근처 스타벅스에 갔다. 거기서 며칠 전에 가족들과 함께 여행 왔다는 청년을 만나 잠깐 대화를 나눴는데, 군대 전역한 날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다음날 아침에 비몽사몽인 채로 비행기에 실려 여기까지 왔단다. 안 그러려고 했는데 얘기를 하다 보니 자꾸 '라테는~~~ 이랬었는데'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런 말을 하면 꼰대랬는데... 이제부턴 정신을 차리고 말해야겠다.'라테는 노~!' 원래는 잠시 쉬었다가 상 조르주 성에 가려고 했는데 그 청년 말이 아까 갔다 왔는데 너무 볼 게 없어서 입장료가 아깝다는 말에 냉큼 안 올라가기로 결정했다. 사실 힘들어서 올라가기 싫던 참에 핑곗거리 하나 잘 만났다 싶었다.

해질 시간이 다 돼서 근처 코메르시우광장에 가서  일몰을 보고 마트에 가서 맥주와 안주를 사서 호텔로 돌아왔다.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고, 맥주 한 캔을 마시며 리스본에서의 첫날밤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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