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시 30분쯤 일어나 여유롭게 조식을 먹고 호텔을 나섰다. 먼저 호텔 근처에 있는 레티로 공원으로 가려는데, 가는 길에 이슬비가 보슬보슬 내리기 시작한다. 앗! 어쩌지? 다시 호텔에 가서 우산을 갖고 나올까 말까 잠깐 고민하다가 귀찮아서 그냥 가기로 했다.
레티로 공원은 펠리페 2세가 세운 별궁의 정원이었는데, 원래는 귀족들만 출입할 수 있었으나 1868년에 일반인에게 공개됐다고 한다. 공원 여기저기에 스페인을 빛낸 작가와 시인 등의 동상과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분수도 많다. 주말에는 화가와 음악가들의 크고 작은 예술공연도 펼쳐지는 마드리드 시민의 휴식처란다. 공원이 엄청나게 넓고 나무도 많은데, 역시 겨울이라는 점이 좀 아쉬웠다.
공원이 워낙 넓다 보니 공원 안에 궁전도 있고 호수도 있다. 먼저 이름처럼 유리로 만들어졌다는 크리스탈 궁전으로 갔다.이 곳은 1887년 벨라스케스 보스코가 완성했다는데, 당시 식민지였던 필리핀에서 들여온 이색적인 식물과 동물을 전시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철조로 된 골조와 벽돌로 된 기단부를 제외하면진짜 대부분이 다 유리로 만들어져 있어서 마치 유리온실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었다. 겨울이라 그런지 온실처럼 따뜻하진 않았지만, 유리라 햇살이 정말 잘 들어왔다. 현재는 예술분야의 전시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고, 건물 앞에는 커다란 인공호수와 분수가 있다.
다음으로 바로 근처에 있는 벨라스케스 궁전에 갔다. 이 곳 역시 벨라스케스 보스코가 완공했다는데, 처음엔 벨라스케스라는 공주 이름을 딴 궁전인가 했다. 아무리 봐도 딱 공주 이름인데... 아무튼 이 곳도 이름만 궁전이지 실제로 궁전은 아니다. 원래는 산업 진흥을 위해 국가차원의 박람회장으로 만들었다는데 현재는 미술관으로 쓰이고 있어 다양한 미술품들이 있다. 안이 따뜻해서 비도 피하고 몸도 녹일 겸 의도치 않게 미술 작품들을 하나하나 천천히 제대로감상하고 나왔다.
비가 오락가락해서 레티로 호수 근처 카페에서 잠깐 비를 피했다가 마드리드 중심에 있는 시벨레스 광장(레알 마드리드가 리그에서 우승한 날에는 선수들과 팬들이 함께 이 분수에서 세리머니를 하는 것으로 유명함)을 지나 어제 갔었던 솔 광장으로 가서 곰 뒤꿈치를 다시 만지고 기념품 쇼핑을 했다. 사고 싶은 건 많았지만 캐리어의 한계로 엄청 자제해야만했다.
배가 고파서 근처 식당에 점심을 먹으러 갔는데 친절한 주인아저씨가 우리랑 얘기가 하고 싶으신지 번역기까지 동원해서 이것저것 물어보신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까 한국말로 '예쁘다!~'를 연신 반복하신다. 뜻은 알고 하시는 건가? 립서비스임이 틀림없다. 그러다 이번엔 웃으며 계속 '보니따(예쁘다)'라고 한다. '예쁘다'는 말을 들은 지가 대체 언제던가.... 여기 여행 와서 밤마다 그날 찍은 사진들을 정리하다가 내 사진을 보며 너무 늙고 못 생겼다고 자괴감에 빠져있었는데 빈말이어도 나에게 '예쁘다'라고 해준 아저씨의 말이 아주 아주 잠시지만 위로가 됐다. '오늘이 내 남은 인생에서 가장 젊고 예쁜 날이다'라는 말을 가슴속으로 되뇌어본다.
아저씨의 립서비스 덕분에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유럽에서 가장 큰 광장 중 하나인 마요르 광장을 들러 산 미구엘 시장에서 간식거리를 샀다. 이제 더 이상 뭘 살 수 없다는 건 잘 알지만 마드리드의 대표적인 쇼핑 거리인 그랑비아 거리를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냥 진~~~ 짜! 구경만 할 생각으로 자라 매장에 들어갔다가 부피를 별로 차지하지 않으니 괜찮다는 핑계로 프릴 달린 셔츠 하나를 샀다. 원피스도 맘에 드는 게 많았는데 아무리 맥시 원피스라지만 길어도 너~무 길어서 땅에 끌릴 지경이다. 어디 가서 키 작다는 소린 안 들었는데 여기선 완전 숏다리다. 짧은 다리에 다시 한번 자괴감을 느끼고 돌아가려는데 스페인 국민 브랜드라는 spera가 세일을 한단다. 또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들어갔다가 트위드 카디건을 덜컥 사버렸다. 캐리어에는 어떻게든 구겨 넣으면 들어는 갈 거다. 그치?
호텔로 돌아가는데 양손에 짐이 한가득이다. 아까 초콜릿까지 샀더니 더 무겁다. 호텔에 가서 짐 정리를 하고 쉬다가 저녁을 먹으러 나왔다. 메뉴는 또 한식. 친구 덕분에 이번 여행에선 한식을 많이 먹는다. 김치찌개는 맛있었으나, 돌솥비빔밥은 날달걀 때문에 질척거려서 비싼 밥을 남겼다. 게다가 서빙하는 종업원이 둘 다 기침을 해서 찜찜한 기분에 오래 앉아 있고 싶지 않았다.
내일 공항에 가려면 제대로 된 마스크를 껴야 할 것 같아서 우리나라 생각을 하고 자연스럽게 약국에 마스크를 사러 갔다. 갔더니 우리 앞에 세 명 정도가 있었는데, 약을 하나 사는데도 엄청 오래 걸린다. 약상자에 붙어있는 바코드 스티커를 떼서 일일이 장부에 붙여놓고 약사님이 또 한참을 물어보고 설명해준다. 겨우 세 사람이었는데 30분은 넘게 기다린 것 같다. 한참을 기다려 마스크를 달라고 했는데, 황당하게도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원래 마스크가 없단다. 마스크를 달라는 우릴 이상하게 생각하는 눈치다. 약국에 그 흔한 면 마스크 조차도 없다니... 진짜 이상하다.
혹시나 해서 마트에 갔지만 역시 없다. 여기 와서 마스크를 한 사람은 한 명도 못 봤는데, 마스크를 안 판다는 건 원래부터 없는 건지 아님 우한 폐렴 (당시엔 우한 폐렴이었음)때문에 품절이 된 건지 알 수가 없다. 마스크 쓴 사람을 본 적이 없으니 원래 없는게 맞는 것 같다. 이곳은 황사나 미세먼지가 없는 청정국이라 없는 건가? 아님 마스크를 잘 안 쓰니 안 파는 건가? 그래도 우한 폐렴이 심해지고 있다는데 마스크를 팔긴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정말 이상하다... 이상해...
뭐 나중에 알고 보니 유럽에선 마스크는 중병에 걸린 사람이거나 테러리스트나 범죄자 같은 위험한 사람들이 하는 거라는 인식이 강해서 마스크를 잘 안 쓴단다.
마스크를 못 구했으니 허접하지만 몇 년째 캐리어 안에 항상 넣고 다니는 일회용 마스크라도 써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