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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록 Sep 10. 2024

꿈1: 틀린 원인의 감정들

우울증이 극에 도달한 시기였다. 스트레스가 정점을 찍으며 모든 게 의미 없게 느껴졌고 그 어떤 것도 더럽게 재미가 없었다. 심심하고 또 심심해서 차라리 귀신이라도 있으면 좋겠다 생각하며 잠에 들었다.


잠에 든 나는 바라던 대로 악몽을 꿨다. 잠이 들기 전의 당돌함이 무색하게도 잠에서 깨자마자 펄쩍 뛰어서 엄마의 방으로 향했다. 새벽 세 시 반이었다. 방 안의 사람이 나 혼자라는 사실이 너무 무서워서 단 1초도 지체할 수 없었고, 엄마의 방으로 뛰어가기까지의 그 짧은 순간에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무슨 일이 반드시 일어날 것처럼 살면서 느껴본 적 없는 공포를 느꼈다.


그렇게 엄마 곁에 누워 잠을 청하려는데 우울증은 여러 방면으로 도움이 하나도 되지 않았다. 불면증 때문에 잠에 들 수가 없었고, 잠에 드는 대신 꿈에서 느낀 공포감 속을 유영하며 살면서 처음으로 순수하게 감정에서 우러난 눈물이 흘렀다. 아무런 사건적 원인 없는 눈물이었다. 그 공포 속에서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건 없이 눈물을 흘려본 적도, 그런 게 가능하다는 사실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숨죽여 울다가 엄마를 깨우기 싫어 거실에 나와 영화를 보기로 했다. [매버릭]을 봤다. 현실을 전부 잊고 이 이상하게 강렬한 두려움을 즐거움으로 매장시켜 버리고자 [시니어 이어]도 봤고, [맨인블랙 3]도 봤고, [행복을 찾아서]를 보려다가 마침내 잠들었다. 그때가 아침이었다.


잠은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자고 깨고 울고 울적하길 반복하다 아빠가 저녁으로 치킨을 사 왔다. 그때 몸이 겪어보지 못한 상태에 있단 걸 지나치게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아파도 떨어져 본 적이 없던 식욕이 떨어졌고, 웬 출처 모를 감정들이 아주 강렬하게 솟아올랐다. 나는 감정적 이어 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아빠와 치킨을 먹을 뿐이니 즐거워야 할 순간이 아무 이유 없이 슬폈다. 거리에서 동냥하는 사람들이 아무 이유 없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며 그 장면들이 너무나도 처량하게 느껴졌고, 그들의 모습이 슬펐다. 알지도 못하는 노인들이 떠오르며 그 모습에 슬퍼했고, 내가 기분이 안 좋다는 이유로 방에 들어가 버리면 혼자 거실에 덩그러니 앉아 치킨을 뜯을 아빠의 모습이 슬펐다. 이렇게 미쳐가는구나 싶었다. 주기적으로 우울기가 왔었지만 돌아올 때마다 매번 더 미쳐가는 것 같았다. 한 계단 한 계단 천천히, 그러나 착실히 위를 향하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러다 언젠가 정말로 미쳐버릴 거라고 확신했다.


전부터 종종 죽기 전에 한 번은, 언젠가 한 번쯤은 분명 정신이 나갈 거라 확신 어린 생각이 들곤 했지만 무서워서 매번 무시해 버렸었다. 그 가볍게 뭉개버린 생각이 현실감 있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미 경험해보지 못한 상태를 경험하고 있는데, 다음 단계는 뭘지 공포스러웠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뚝 떨어져서 아빠를 혼자 두고 싶지 않은 마음을 뒤로하고 화장실로 갔다.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아니, 멈췄다 흐르고 또 멈췄다 다시 흘렀다. 가까스로 방에 기어 돌아와 더 울었다. 아빠는 내가 슬프다고 생각한 그 모습 그대로 치킨을 먹고 있었다. 대화를 하고 있던 거였는데 대답도 제대로 못 해주고 대화 상대도 잃게 만들었다는 사실이 미안해서 더 눈물이 났다. 아빠는 그냥 평소처럼 치킨을 먹고 있을 뿐이었다.


그날 밤은 전날과 반대로 엄청나게 많이 잤다. 답이 없다고 느낀 나는 그냥 자고 일어나고 또 강제로 자려고 하기를 반복했다. 이 정도까진 와본 적 없었는데. 놀라움과 동시에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태가 어처구니가 없었다.


감정이 고장 났음이 확실했다.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상태였다. 더 이상 좋은 것을 봐도 좋지 않았고, 그 방법 또한 알고 있지 않았다. 전에는 좋은 것을 보면 좋은 게 당연했기 때문에 그 방법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으니 모르는 게 당연했다.

하다못해 그 정도에 그쳤으면 좀 나았겠지만, 전혀 관계없는 감정들이 갑작스럽게 튀어나오질 않나 여러모로 불편한 나날이었다. 정말 좋아하는 초콜릿 딸기 케이크를 두고 기뻐하지는 못할망정 슬픈 감정이 드는 게 가능할 거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감정이 이렇게 뒤죽박죽에 막무가내인 아이였던가. 보통 내 감정이란 저 가장 밑바닥에서 조용히 있는 친구였는데. 당황스러웠다.


어딘가 고장 난 상태. 그 조용하던 감정이 공격을 해왔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통받는 것 외엔 없었다. 즐거운 게 없었으니 하고 싶은 일도, 해야 한다고 느껴지는 일도 없었다. 이럴 거면 왜 사나,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왜 사나, 삶에는 대체 무슨 의미가 있어서 사나.... 그런 생각만을 반복하며 의미 없는 나날들이 하루하루 사라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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