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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록 Sep 12. 2024

우울증2: 희망의 박탈

방 안에 갇힌 사람이 방의 외벽을 볼 수 없는 것처럼, 우울증에 걸리면 우울 밖에도 세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게 된다. 그리고 확신한다.


나는 여기서 나갈 수 없다고. 영원히 갇혔다고.  


지금이 나중이 되고 돌아보면 매번 우스운 일이지만, 그때 당시에는 이 사실이 반드시 참일 것만 같다. 벗어날 수 있는 희망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이.




감정이 차단된 상태에서 희망 또한 박탈당한다는 사실이야말로 우울증의 가장 무서운 점이 아닐까 싶다. 무기력하고, 즐거운 것 하나 없는데 미래가 나아질 거란 생각 또한 전혀 들지 않는다. 아주 치밀하게 미래를 생각해 보아도 도저히 나아질 방법이 보이지 않는다. 


현재의 삶이 시궁창인데 앞으로의 인생이 더 나아지지도 않는다면 살기 싫어지는 건 당연하지 않은가?


나는 배움을 위해서 대학에 진학했다. 취업을 바라본 것도, 학교의 이름값을 바라본 것도 아니었다. 오로지 교육과 흥미, 그 본질적인 가치만을 바라보며 학교와 전공을 골랐다.

그러나 1학년 막바지에는 취업까지 맞바꿀 각오로 선택한 과학이 하나도 재미없고 의미 없는 짓거리로만 보였다. 궁금한 질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걸 묻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어 펜을 내려놓는 날들이 반복됐다.


지금껏 가지고 있던 커다란 의미가 사라졌고 삶의 원동력이 죽어버렸다. 그 커다란 부피가 공백이 되어보니 더없이 공허했다.


회의적인 상태가 되자 과학이 재미없는 논리적인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이유 찾기 능력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 힘을 발휘했고, 무의미에 그럴싸한 이유를 붙이는 일이 번번이 성공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과학은 논리적으로 재미없는 일이 다. 


빛나던 것들이 사라진 살아갈 이유가 없어 보였다. 과학이 다시 재미있어질 가능성은 없었다. 논리적인 이유를 찾아놓았기에 확신은 쉬웠다. 그렇게 신뢰가 가는 이유가 있다며 희망을 믿을 수 없다고 믿었다.


감상적인 헛소리라고 생각하는가? 그냥 일어나서 하면 되지 뭘 구시렁대고 있느냐 싶을지 모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감정이란 생각보다 강력한 녀석이다. 감정 상태에 따라 우리가 할 수 있는 생각과, 보고 믿을 수 있는 희망의 정도가 아주 쉽게 바뀐다. 감정이 죽으면 체력도 함께 죽어버리고, 희망도 살지 못한다.


우울증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이 우울증과 함께하는 삶을 잘 상상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그 존재를 인식하지 못해도 희망이 항상 머릿속에 있고, 오늘 하루는 재미없기 짝이 없었지만 조만간 나아질 것임을 이성이 알기 전에 몸이 기억하기 때문이다. 엄지손가락이 없으면 단추도 채울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가 모르는 것처럼, 희망이 언제나 그곳에 있어주니 우울증을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너무 '당연한' 일상이니까.


이 사실이 당연해 보인다면 생각을 조금만 전환해 보자. 우울증 환자가 희망을 믿을 수 없는 것도 같은 논리다. 


일반인들이 우울증 환자의 삶을 잘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우울증 환자도 일반적인 삶을 상상하거나 믿기 힘들다. 희망 있는 삶을 상상하지 못함을 거짓이라 말하려면 희망 없는 상상을 할 수 없는 일반인의 삶도 거짓이어야 한다. 단지 우울증 환자보다 우울증을 앓지 않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의 세계가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우울증을 앓은 나도 잠시 상태가 괜찮아지자마자 증상이 심할 시기의 일을 상상하기 힘들었다. 그게 감정이 하는 일이다. 희망이란 감정의 그림자처럼 함께 나타났다 사라진다.


그러나 우울증은 진짜다. 증상이 나을 때는 이해하지 못했다 했지만 증상이 심할 때는 철저하게 희망 없는 세계에 갇혀 있었다. 감정은 고장난지 오래였고 더 이상 좋은 것을 봐도 좋지 않았다. 뜬금없는 이상한 감정들이 묻지도 않았는데 튀어나오기도 했다. 더 이상 기대할 수 있는 희망은 없다고 굳게 믿었다. 빠져나갈 수 없는 고통의 미로 속을 빙글빙을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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