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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록 Sep 06. 2024

우울증

1. 감정의 차단

부러진 다리를 보고 ‘가짜 아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눈에 명확히 보이니까. 그러나 우울증의 경우에는 손상이 가해진 신체 기관이 눈에 보이지도 않고, 중증이 아니라면 숨기는 것 또한 가능하기에 종종 가짜란 소리를 듣는다.




감정이란 무엇인가? 정상적인 상황에서 우리는 예쁜 것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고,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친구와 시간을 보내면 즐거워지고, 길을 걷다 똥을 밟으면 기분이 나빠진다. 당연한 소리다.      


아니, 당연한가?     

이 모든 것이 한 번도 틀리지 않고 작동하는 것이 오히려 경이롭지는 않은가?      


위의 예시들은 모두 [A를 함->B감정이 듦]의 꼴을 띄고 있다. 허탈함이나 부질없음을 느끼는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면 200번을 하면 200번 모두 행위 A는 감정 B로 이어진다. 똥을 밟아서 기분이 좋아진다는 이야기가 이상하게 들린다는 점에서 확신할 수 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신기하지 않은가?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언제나 A가 B로 이어진다는 사실이 말이다. 어쩜 우리 몸은 오류도 없이 정확한 값만을 매번 도출해 내는 걸까?

젠가를 보존하는 것보다 무너뜨리는 게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쉽고, 오케스트라 연습에서 누군가 실수를 하는 게 실수 없는 완곡보다 훨씬 쉽다. 우리는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몸에 너무나도 익숙한 나머지 이 몸뚱어리가 작동하는 방식이 고차원적이라는 사실을 종종 잊어버리고 마는 것 같다. 원래대로라면 수백 번의 ‘옳은’ 결과를 도출해 내는 것보다 한 번쯤 틀린 결과가 끼어있는 것이 확률적으로 더 쉽다.


A->B는 당연하지 않다. 2+2=4와 같은 불변의 진리가 아니다. 우리 집 앞 카페의 강아지가 대체 왜 ‘귀엽다’는 감상을 초래하는가? ‘귀여움’은 왜 ‘기분 좋음’으로 이어지는가? 귀엽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카페의 강아지를 보고 ‘귀엽다’고 느끼는 것은 뇌의 기작이다. 강아지가 어떻게 생겼든지 간에, 결국 강아지의 얼굴을 눈으로 ‘보고’ 그 정보를 뇌로 ‘전달’한 다음 귀엽다고 ‘느끼는’ 것은 모두 일련의 신체 작용이다. 그 작용에 필요한 신체 부위가 망가지면 일련의 기작이 파괴됨은 자명하다.


무섭게도 어쩌면 우리가 아주 단단한 것으로 취급하고 있는 ‘감정’이란 더없이 가벼운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뇌로 느끼는 무언가일 뿐이기에 뇌가 바뀌면 느끼지 못하게 될 수도, 또는 더 강렬하게 느끼게 될 수도 있다.

1954년 제임스 올즈와 피터 밀러는 쥐가 뇌 시상하부의 전기 자극을 주는 레버를 계속 누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시상하부에 가한 전기 자극이 쾌락을 준 것이다. 이처럼 뇌 특정 부의의 자극이 특정 감정을 초래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즉 A의 부재, 현실 세계에서의 어떤 일 없이도 B, '기분 좋음'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반대로 A가 있음에도 B가 없는 경우도 가능할 것이다. 가령 뇌의 어떤 부위가 망가져 A에서 B로 가는 길이 끊긴다면 ‘즐겁다’ 느껴야 하는 행동들을 해도 더 이상 ‘즐겁다’고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나는 정신과 의사도, 생리학자도 아니기 때문에 실제로 우울증에 걸렸을 때 해부학적인 장애가 생기는 건지는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내가 느낀 우울증이란 A에서 B로 가게 하는 정상적인 루트가 파괴된 상태였다. 귀여움이 기분 좋음으로 이어지지 않고, 맛있는 음식이 행복감으로 이어지지 않고, 그간 열정의 불씨를 태웠던 것들이 더 이상 나를 흥분시키지 않는 상태. 우울증에 걸렸을 때의 나는 어딘가가 부서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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