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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록 Sep 03. 2024

구덩이 이야기

구덩이가 하나 있었다. 구덩이는 흙으로 덮여 있어 내용물을 알 수 없었는데,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구덩이 안에는 정말 멋진 것이 들어있어.”


출처도 모르는 말이었지만 옆 사람의 맹신이 그들을 부추겼고, 또 그 옆사람을 부추기며 신뢰는 두터워져만 갔다.


하루는 사람들이 구덩이를 파보기로 결정했다. 오랜 시간의 삽질 끝에 바닥이 보이기 시작했다. ‘멋진 것’은 무엇이었을까? 기대와 긴장으로 내부를 들여다본 사람들은 깨달았다. 구덩이 안에 ‘멋진 것’은커녕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기대를 배신당했다는 실의와 허무함이 두터웠던 신뢰의 자리를 대신했다.


그러나 구덩이는 어이가 없었다. 애초부터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에게 멋대로 기대한 뒤 멋대로 실망해 버렸다. 구덩이에게 소문이 진실이냐고는 묻지도 않은 채 말이다. 만약 사람들이 멋대로 ‘멋진 것’을 믿지 않았다면, 실망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 위험성도, 그 믿음이 좌절될 수 있다는 사실도 똑똑히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믿음은 맹신일 뿐이고, 맹신의 결과가가 좋을 때는 운이 좋을 때뿐이다.




삶이 엇나갈 때마다 우리는 "왜... 살지?"라고 묻는다. 왜긴 왜야. 이유는 간단하다. 진화가 인간이 죽고 싶어 하기보단 살고 싶어 하도록 부추겼기 때문에, 그리고 지금껏 죽을 일이 딱히 없었기에 살아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설명을 듣고 만족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삶의 이유로 진화론을 들먹이면 사람들은 화를 낸다. 그런 뜻에서의 삶의 의미를 물은 게 아니라고, '그런 거' 말고 철학적인 답을 원한 거라고 말이다.


먼저 한 가지를 짚고 넘어가자. 이들이 진짜로 묻고 싶었던 질문은 '삶의 이유'가 아니다. 그들이 묻고 싶었던 것은 '삶의 철학적 의미는 무엇인가?'다. 그런데도 '삶의 이유'라는 질문을 했다는 건, 두 질문이 같게 취급되고 있다는 뜻이다.

삶의 이유와 삶의 철학적 의미, 가지는 흔히 동일한 질문으로 취급된다. 그러나 두 질문이 같으려면 한 가지 명제가 참이 되어 주어야 한다.


명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음은 삶에 (우리가 모르는) 철학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명제는 당연하지 않다. 앞서 말한 진화론에 철학적 의미가 들어있었는가? 철학 없이도 진화론은 잘만 굴러갔고, 우리가 살아있는 이유를 잘 설명해 주었다. 그저 존재하는 것에 인문학적 의미가 항상 부여되어 있지는 않다. 인간이 철학 없이는 살아있을 리 없는 고귀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한 태도다.


'삶의 철학적 의미'란 '삶의 이유'와는 다르게 근본적이지는 않은 부가적 질문이다. 철학은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근사한 철학이 뒤에 없어도 인간은 살아갈 것이다. 그것이 현실이다. 멋진 질문이라고 해서 언제나 철학을 통해 대답될 수는 없다.

고로 명제는 참일 필요가 없고, 두 질문은 명백히 다르다.


진화론 따위가 삶을 설명하는 것이 주제넘고 기분 나쁘다고 느껴진다면 구덩이 이야기를 생각해 보자. 우리는 인문학과 철학, 그리고 삶에 과하게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삶은 고귀한가? 인문학과 철학은 이 고귀한 인간의 삶에 걸맞은 옷인가? 글쎄. 그에 대한 증거는 아무것도 없다.


고귀함이라는 가치도 인간이 발명해 낸 것이다. 인간 존재 이전부터 있던 원초적인 고귀함이란 없다. 모든 것은 그저 존재할 뿐이고, 거기에 의미를 불어넣는 것은 온전히 우리의 상상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다. 상상 속에서 태어난 것을 상상 밖으로 가져간다면 그것이 틀린 것이 되었을 때의 충격을 감내할 용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상상 밖으로 나갔을 때 그들이 틀린 것이 될 가능성은 매우 높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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