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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록 Sep 24.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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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게 살면 +

죽음이란 탈출구는 사실 존재하지 않았고 나는 내리 사방이 막힌 삶이라는 방 안에 갇혀 있었다. 그 생각에 입술만 잘근잘근 깨물던 어느 날 나는 내가 논리의 한 쪽에만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단 사실을 깨달았다. 


'불행이 음수라면, 그래서 0으로 가는 게 낫다면 반대로 양수는? 만약 내 삶이 행복하다면 같은 논리로 굳이 죽을 필요가 없어지지 않나?'


그렇담 굳이 본능을 거스르는 힘듦을 감수하고까지 죽어야 할까? 어쩌면, 어쩌면 굳이 높은 활성화에너지를 들여가면서까지 자살을 하지 않아도 될지도 몰랐다. 어쩌면 완벽히 갇힌 게 아니라 탈출구가 있을지도 몰랐다. 


여기서 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하고 좋은 질문이 따라왔다. 


'활성화에너지와 행복을 찾아 나서는 데 드는 에너지 중 어느 쪽이 더 클까?'


 답이 나오는데까지 큰 고민은 필요하지 않았다. 두 선택지 중 하나는 허상이고 실은 존재하지 않는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삶에 갇힌 사람이다. 죽을만큼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니다. 자살이 옳은 선택지임을 나 자신에게 확신시키기 위해서 심리적인 거부감과 죽을 때의 미지의 고통을 극복하려 노력해도 진전은 없을 것이 뻔했다. 그러니 행복을 찾아 나서는 데 얼마나 큰 에너지가 들든 비교는 무의미한 짓이었다. 다른 쪽의 값은 무한에 수렴하는 게 확실해보였으니까. 나에게 행복을 찾아 나서는 것 외의 선택지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때 나는 결심했다. 죽는 대신, 행복해서 굳이 죽을 필요가 없는 삶을 싶다고. 그런 삶을 살아내겠다고. 


웃기게도 지금까지는 극복할 수 없을만한 것으로 다가와지던 우울증이 이 결정에서는 아무런 장애물이 되지 않았다. 행복하려면 우울증을 극복해야 할 텐데, 그럼에도 나는 행복해져야겠다 생각하고 있었다.




삶을 살아가는 공통적인 이유나 철학을 찾으려 노력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누군가가 말했다. 의미란 각자에게 다를 것이기 때문에 공통된 이유를 찾는 허사라고 말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돌고 돌아 다시 이 문제로 돌아왔다. 누군가 대충 그리 물으면 나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내 삶의 의미는 '행복'이라고. 그리고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행복해서 굳이 죽을 필요가 없는 삶을 살고 싶다고 말이다.


그러나 잠깐의 주의를 부탁드린다. 나는 행복을 쫓기 위해 살고 싶다 말하는 것도, 행복을 쫓는 삶이 궁극적으로 옳은 것이라 말하는 것도 아니다. 삶의 의미란 별거 없다. 그저 본능이 밀어부쳤기에 살고 있다는 믿음에는 아직 금이 가지 않았고(더 나은 설명을 찾는다면 기꺼이 그 논리를 믿을 것이다) 그렇기에 더욱이 무언가를 위해서 살아야 한다고 믿지 않는다. 


나는 행복을 위해 살고 싶은 것이 아니다. 행복해서 굳이 죽고 싶을 필요가 없는 삶을 살고 싶은 것이다. 둘은 명백히 다르다. 잠시 멈춰 둘의 차이를 생각해보시길 바란다.


이때부터 내게 '행복'이란 길거리에서 나눠주는 '행복하세요' 팜플렛 혹은 새해 아침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친척에게 보내는 ‘행복한 새해 되세요’ 이모티콘같은 시시한 의미를 가지지 않게 되었다. 이 순간부터 나에게 행복이란 무엇보다도 전투적인 것이었다. 


이로 인해 행복에 대한 집착이 생긴 적도, 고난에 빠진 적도 있었지만 내가 살고싶은 삶은 아직도 변함이 없다. 행복이란 본능 이상의 삶의 이유였고, 아직도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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