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ic- 길동의 게스 데님 팬츠
펭귄 한 마리의 충돌로 분리된 빙하. 알 수 없는 해류의 움직임을 타고 북극에서 떠내려와 대한민국까지 오게 된다. 교각 건설 중인 한강변에 멈춰서 공사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지만 무공해 얼음이 들어왔다는 소문을 들은 인근 상인들의 활약으로 순식간에 대부분이 사라진다. 살을 다 발려먹고 남은 생선 뼈처럼 남겨진 빙하의 잔해 속에, 냉동되어 동면했던 동물은 크기가 작아진 빙하가 비를 맞아 모두 녹아내리면서 한강과 이어진 배수로를 타고 서울시 도봉구 쌍문동의 개천에 다다라 긴 잠에서 깨어난다.
비 내리는 쌍문동의 개천 다리를 걸어가던 영희는 개천 바닥에 쓰러진 강아지를 발견한다. 강아지가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오빠 철수를 데려오지만, 바닥이 빗물로 가득 찬 모습만 보게 된다. 집으로 돌아간 남매는 어느새 방 안에 영희가 개천에서 보았던 강아지가 있음을 알고 깜짝 놀란다.
강아지인 줄 알았던 동물이 자세히 보니 종(種)을 알 수 없는 처음 보는 생김새를 하고 있어 당황하는데 때마침 TV에 나오는 공룡을 보며 "엄마!"라고 말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퇴근한 아빠 고길동은 영희가 키울 거라는 생명체를 야생동물로 생각하여 버리려 하지만 자신을 향해 사람 말을 내뱉는 모습에 기겁하고 어떤 동물인지 확인하기 위해 병원에 데려간다.
엑스레이를 통해 살펴본 동물의 골격은 억만 년 전 멸종된 케라토사우르스. 공룡 그림을 보고 엄마라고 불렀다고 영희가 증언하지만 엑스레이에 보이는 두개골의 반점은 의사로 하여금 진짜 공룡이라는 결론을 내리지 못하게 한다. 연이어 최면술사에게 찾아가 최면을 통해 의문점을 밝히려 하지만 역으로 전문가가 최면에 걸리며 아무런 정보도 알아내지 못한다. 어느새 고길동 가족의 일원이 된 정체 모를 동물은 '둘리'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서울살이를 시작한다.
만화잡지 <보물섬>에 1983년 4월 22일 첫 연재를 시작해 엄청난 인기를 모으며 '국민' 타이틀을 갖게 된 명랑 SF 코믹 만화 <아기공룡 둘리>. 그로부터 10년 동안 연재를 하며 남녀노소를 불문한 국내 최고의 인기 만화가 된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그린 만화지만 뛰어난 창의성과 독특한 스토리는 독보적인 매력을 발산하며 보는 이를 모두 작품의 캐릭터와 사랑에 빠지게 만들었다. 지구상에서 멸종된 공룡이 빙하 속에 잠들었다가 현대에서 깨어나 초능력을 발휘하며 벌어지는 일상과 모험의 이야기는 기상천외(奇想天外)하고 으뜸가는 특별함으로 다가와 "어떻게 이런 아이디어를 떠올렸을까?"라는 생각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아기공룡 둘리>는 광고계에서 소비자를 사로잡는 만능 키워드로 불리는 세 가지 요소 아기(Baby), 미인(Beauty), 동물(Beast)의 관점을 모두 갖췄다. 주인공 둘리는 어린이(아기)이며 지구상에서 멸종된 공룡(동물)으로서 빼어난 귀여움을 가진 외모(미인)다. 작품의 제목에서 '아기'라는 상징성을 빼고 <공룡 둘리>라고만 했을 때 느껴지는 어감부터가 다르다. 세상사를 이미 체험으로 다 알고 있을 어른은 느낄 수 없는 무구한 감정, '아기'란 단어가 내포한 미성숙한 시절은 어린이에겐 함께 성장하며 공감과 대리만족을 성인에게는 성장을 지켜봐 주고 싶은 모종의 뿌듯한 책임감마저 들게 한다.
기발한 소재의 희소성과 함께 만화의 인기를 견인한 것은 뛰어난 캐릭터 디자인과 주조연을 가릴 것 없이 유별난 개성으로 활약하는 등장인물들 때문이다. 이를 가능하게 한 창조자 김수정은 6살 때 처음 만화를 접하고 그리기 시작, 일찍이 자신의 재능을 알며 10대 때부터 크로바 만화 동인회에서 활동해 만화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꿈에 대한 그의 열망은 여러 가지 우여곡절 속에서도 사그라들지 않고 독학으로 만화를 공부해 1975년도 소년한국일보 신인만화 모집에 당선하며 데뷔하는 쾌거를 이룬다.
둘리의 유명세에 가려져 있지만 만화가 데뷔 이후 꾸준한 활동 속에 기존의 명랑만화 장르를 넘어 다양한 시도의 이야기를 만들어왔다. 여고를 배경으로 여고생과 교사의 일상을 그린 하이틴 코믹 만화 <오달자의 봄>. 샐러리맨의 비애를 풍자한 성인만화 <날자 고도리>. 발명가가 주인공인 코믹만화 <미스터 제로>. 꼬마 악마 저승사자가 활약하는 명랑만화 <아리아리 동동>. 꿈과 희망을 찾아가는 아이들의 휴먼스토리 <일곱 개의 숟가락> 등의 작품은 풍부한 상상력과 탁월한 스토리텔링 능력을 보여주는 그의 대표작들이다.
펜 선의 기교 없이 단순한 선으로 그리는 김수정의 만화는 언뜻 보기에 쉬울 것 같지만 오히려 그 반대다. 단조롭게 생긴 그림은 화려하게 꾸미는 겉치레가 없기에 캐릭터의 특징을 비롯하여 몸짓과 표정의 묘사를 그림체에 걸맞게 포인트를 주고 응집하는 고난도에 생략과 강조의 기술을 요한다. 그것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때 특유의 개성이 더 해지며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대사 없이도 움직임으로 상황을 표현해 매끄럽게 내용 전달이 가능한 작가의 주특기는 내공을 키운 그림의 반석 위에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아기공룡 둘리>에 시종일관 원초적인 웃음을 주는 '몸개그'는 캐릭터의 움직임을 철저히 생각해 만든 슬랩스틱 코미디의 정수를 보여준다. 만화의 이야기에 재미를 더하는 재치 있는 대사도 그림의 움직임이 만드는 시각적 유연함이 있기에 따로 또 같이 돋보이는 것이다. 작가는 만화적 세계가 펼쳐지는 사각의 프레임도 필요에 따라 외곽의 실제 세계로 넘나들기를 주저하지 않고 공상과 현실을 연결하는 요소로 무엇 하나 허투루 쓰지 않는다. 이렇듯 노련한 화가의 면모는 찬란한 명작을 완성하는데 기여했다.
작업이 너무 바빠서 원고에 식자(植字) 작업을 할 시간이 없던 작가는 말풍선 안의 대사도 그림처럼 직접 손으로 적는다. '둘리체'라 명명하여 폰트를 만들어 주길 바랄 정도로 예쁜 글씨는 작품에 거슬리지 않고 참 잘 어울린다. 이 만화를 위해 일부러 손글씨를 만들어 냈다는 표현이 더 맞다고 느껴질 정도다. 한글의 자모를 적절히 축소하고 확대해 만든 글씨체는 완성도 있는 서체의 아름다움까지 보여주며 <아기공룡 둘리>의 핵심 매력인 '귀여움'을 배가시킨다.
전 연령을 아우르는 만화 <아기공룡 둘리>는 한국에 자본주의의 스타성을 가진 캐릭터의 탄생을 알린 신기원(新記元)이다. 단행본의 인기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TV 애니메이션은 원작 작가의 의도와는 다르게 만들어졌지만 선풍적 신드롬을 일으켰다. 주인공 둘리와 친구들의 매력은 단발성에 머무르지 않고 지금도 꾸준히 회자되며 한국 만화계를 길이 빛내는 영웅이다.
둘리의 캐릭터들은 1986년 롯데 빼빼로 과자를 시작으로 식품, 주류, 가전, 자동차, 제약 등의 광범위한 분야를 총망라 한 상업 광고의 탑모델이다. 동심, 가족애, 삶의 애환까지도 표현해 내는 작품의 힘은 새로운 시대와 세대를 만나 호흡을 멈추지 않고 생명력을 이어 가고 있다. 만화에서 다뤘던 소재는 일상에서 벌어지는 소동 이외에 환경오염과 전쟁 등의 세계적 이슈도 다뤄 낼 만큼 인간의 삶에서 벌어지는 모든 이야기에 주목했다. 스토리에 경계를 짓지 않고 경직되지 않은 사고 속에 살았던 캐릭터들은 여기저기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배제되지 않으며 한데 뒤섞여 언제라도 새 얘기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국내 만화 캐릭터 산업의 선구자로서 둘리는 라이선스 사업의 기틀을 다지며 다양한 분류의 제품군에서 현재에도 발군의 저력을 보인다. 21세기 국내 캐릭터 시장에서 스타가 된 '뽀로로'와 '티니핑'이있지만 둘리의 비 할 데 없이 기발한 상상력과 견고한 스토리의 원작 출판만화는 신의 탄생 설화로 여겨도 무방할 전설이 됐다. 그 전설을 배경으로 갖춘 캐릭터의 총집합인 <아기공룡 둘리>의 아성(牙城)에 현재로선 대적할 상대가 없다.
2001년 발행된 <아기공룡 둘리>의 크리스마스 실은 다가오는 2002년 한일 월드컵을 기념 및 홍보하기 위해 제작된 것으로 둘리는 국가적 이벤트의 전면에 내세울 만큼 국민의 높은 인지도와 사랑을 독차지한 한국 만화계의 영원한 아이돌임을 증명한다. 1983년에 시작해 강산이 4차례 바뀔 동안 롱런하는 만화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 전 세계에 하나뿐인 '초능력을 가진 아기공룡'이라는 국보급 문화 아이콘을 비롯해 어디서도 보지 못했던 매력적인 만화 주인공들이 누구인지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둘리. 레전드 만화 <아기공룡 둘리>의 주인공이자 알파와 오메가인 초록색 아기공룡. 지구를 정찰하기 위해 온 외계인에게 실험체로서 수고해 준 고마움의 표시로 뇌수술을 받아 후천적으로 초능력을 갖게 된다. 이 때문에 지구상의 공룡이 모두 멸종했을 때조차 빙하 속에 동면 상태로 잠들었다가 홀로 살아남는다. 빙하가 우연한 계기로 녹아 20세기 대한민국에서 깨어난 둘리는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곧바로 한국어로 일상 대화가 가능한 뛰어난 지능을 보인다. 오갈 데 없던 둘리는 처음 본 대상인 영희를 따라가 가족의 일원이 되어 살게 된다.
공룡의 유일한 생존자로서 초능력이라는 특별한 힘을 가진 둘리는 그 능력을 발휘할 때 외치는 주문마저 범상치 않다. "호이~!" 진중함이나 강압적으로 압도되는 느낌 없이 허공에 나부끼듯 바람처럼 가볍고 상쾌한 리듬을 가진 이 주문은 캐릭터가 가진 매력에 화룡점정으로 날개까지 달아 준 셈이다.
중생대 쥐라기 후기 살았던 '케라토사우르스'를 모티브로 만든 둘리. 종의 특성은 이립 보행을 하고 긴 꼬리의 신체 구조를 가진 육식 공룡이지만 원작에 그려진 둘리의 엄마 공룡은 거대한 몸집에 사족 보행을 하는 초식 공룡 '브라키오사우르스'와 '브론토사우르스'의 특징을 합하여 그려졌다. 바쁜 연재 속에 벌어진 작가의 설정 오류지만 커다랗고 푸근한 엄마 공룡에 비해 작디작은 둘리의 몸집이 고목나무에 붙은 매미처럼 대비되며 '아기공룡'의 매력이 극대화되는 이득을 얻었다.
(이후 1996년 개봉한 극장판 애니메이션에서 김수정 작가는 둘리 엄마도 케라토사우르스의 몸으로 그려 설정 오류를 바로 잡지만 개인적으로는 거대한 모습의 엄마 공룡이 더 좋다.)
푸근한 엄마 공룡 슬하에 둘째로 태어나 둘리라는 이름을 가진 유래에서 형제 관계를 알려주며 '하나'라는 이름이 나온다. 호칭은 오빠. 둘리가 여자애인 영희를 '오빠'라고 부르는 것으로 유추해 하나는 둘리의 누나다. 어린이들이 남녀 성별로 다른 호칭을 헷갈려 하는 모습을 아이디어로 착안한 설정은 어린 둘리의 어리숙함을 잘 나타낸다.
지점토를 동글동글 이어 붙여 만든 듯한 말랑한 얼굴형과 완만한 곡선의 이마에 두 가닥의 머리털이 포인트로 돋아있는 둘리. 커다란 물방울 같은 눈은 순박해서 주변의 모든 것에 호기심을 갖고 바라본다. 찹쌀떡을 연상시키는 하얗고 입체적인 뿔은 엉덩이에 달린 꼬리와 함께 둘리가 '공룡'이라는 정체성을 보여준다. 연재 2화부터 등장한 '혀 내밀기'는 전매특허로 둘리 하면 떠오르는 금쪽같은 상징이 되었다.
둘리는 보통의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동물 캐릭터처럼 사람의 '옷'을 입고 생활하지 않는다. 순진하고 착한 봉제 곰 인형 푸(Pooh)는 원작 소설의 삽화에서 옷을 입지 않은 봉제 인형 자체의 모습으로 그려지지만 디즈니 애니메이션에서는 빨간 티셔츠를 입고 나온다. 2014년 폴란드 투션시의회는 상의만 입고 하의는 입지 않는 애니메이션의 푸가 야해서 아이들에게 악영향을 끼친다며 '하의실종'을 비판했다.
국내에서도 비슷한 논란을 겪은 캐릭터 '뽀로로'는 학부모들의 항의로 옷을 입게 된다. 옷을 입은 뽀로로는 펭귄이 가진 동물로서의 신체적 특징, 헤엄치기에 알맞게 지느러미 형태로 진화한 날개와 짧은 다리 골격이 없어지고 길어진 다리와 손가락이 생기는 난데없는 진화를 하며 캐릭터를 탈바꿈시켰다. <아기공룡 둘리> 연재 당시에도 만화 심의와 검열에서 어린이들에게 유해하다는 오해를 받아 비교육적이고 폭력적인 작품으로 지탄받기도 했다. 특히 극 중 '희동이'가 기저귀를 안 차고 등장하면 외설(?) 논란까지 이어지는 웃지 못할 상황도 벌어진다.
인간 사회 규범을 아직 다 배우지 않은 시기의 희동과 같은 어린 아기에겐 나체는 결코 부끄러운 상태가 아니며 갑갑한 게 싫어 벗는 게 더 편해 좋다고 느끼는 자연스러운 탈의다. 동물이나 아기에게는 인간이 사회화로 알게 되는 벗은 몸에 대한 수치심이 없다. 동물의 털갈이나 파충류의 탈피는 사회적 시선에 의한 것이 아닌 생체와 환경의 변화에 따라 벌어진다. 외형을 보호하는 털과 가죽은 동물이 날 때부터 갖고 나오는 최초이자 최후의 옷이라고 말할 수 있으나, 엄연히 사람이 만든 옷과 같을 수 없다.
명랑만화를 명랑하게 못 보는 것은 오로지 편견에 찌든 우울한 마음을 가진 일부 성인이며, '옷을 제대로 갖춰 입지 않은 캐릭터는(동물은) 음란하다'는 프레임은 지극히 인간의 시선에서 발현된 편협한 생각이다. 현실에서 인권과 동물권 신장을 위해 각각 부단히 노력하면서도 왜 상상으로 만들어진 세계의 동물이나 캐릭터가 옷을 입거나 입지 않을 자유에 대해서는 매서운 잣대로 규정지어 창작의 자유를 훼손하려 하는지 의문이다. 김수정 작가가 만화에서 표현한 동물은 인간과 함께 현대사회에 살아가며 같은 언어로 의사소통을 하고 동일한 음식을 먹는 등 집단생활양식을 따르지만 그 세계에 속하기 위해 억지로 옷을 입혀 사람과 비슷하게 만들려 하지 않는다. 둘리가 작품에서 옷을 입을 때는 스스로 선택한 것이다.
만화 1화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등장한 '목줄'을 착용한 둘리는 어떤 동물인지 정체를 알기 위해 외부로 나갈 때 영희의 손에 이끌려 수동적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2화부터는 애완동물도 아닌 그저 둘리로서 고길동의 가족에게 인식되어 행동의 제약 없이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은 건 스스로 냉장고에서 꺼내 먹을 수 있는 동거인의 위치임이 보인다. 개체로서의 자율성을 인정받기에 그 어느 누구도 둘리에게 "왜 옷을 안 입느냐?"라고 말하는 이가 없다. 동물은 원래 의복이라는 문화가 없으며 안 입는다고 풍기 문란을 일으키는 논란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입고 안 입고는 둘리의 선택이라는 걸 주변인들 모두가 존중하는 것이다. 이 덕분에 둘리는 작품 안에서 '공룡'이라는 본인의 정체성을 침해받지 않고 생김 그대로 살아갈 수 있었다.
둘리 다음으로 들어오는 두 번째 객식구, 하지만 유일하게 사고를 쳐도 구박받지 않는 존재 '희동'은 고길동의 조카로 부모가 미국 유학길에 올라 양육을 맡긴다. 같이 사는 식구들 중 둘리를 가장 좋아하는 인물로 자신을 돌보며 몸으로 놀아주는 형아 둘리에 대한 애정이 크다. 둘리에 대한 약간의 소유욕(?)도 있어, 타임 코스모스를 타고 간 시간여행에서 엄마와 상봉한 둘리가 과거에 남으려 하지만 희동이가 남몰래 밧줄에 묶어 다시 현대로 돌아가게 돼 이뤄지지 않는다.
가까이 가면 고소한 분유 냄새가 날 것 같은 귀여운 외모지만 별명은 쌍문동 슈퍼 베이비, 공포의 젖꼭지, 개동이(도우너가 지음)로 불리며 가장 어리지만 최고의 전투력을 지녔다. 초능력을 가진 공룡 둘리와 괴력의 외계인 도우너도 희동이의 육탄 공격엔 맥을 못 춘다.
타인이 음식을 떠먹여 주기에 흘림을 방지하기 위한 턱받이를 착용하며 아직 대소변을 가리지 못해 기저귀를 입고 다닌다. 모성을 그리워하는 아기로 입에 공갈 젖꼭지를 항상 물고 다녀 말을 할 때 발음이 부정확한 경우가 많다. 부정확한 발음은 보통의 아기로선 해낼 수 없는 활약을 하는 캐릭터가 어린 '아기'임을 독자에게 상기시키는 동시에 강력한 힘과 상반된 허술한 특징을 더하여 희동이만의 매력을 한층 더 끌어올렸다. 초강력 파워 아기 희동이는 김수정 작가가 작품 안에서 가장 아끼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깐따 삐야라는 별에서 시공간을 넘나들 수 있는 '타임 코스모스'로 비행하는 도중 기계가 고장 나면서 원래 가려고 했던 곳이 아닌 지구에 있는 고길동의 집 앞마당에 불시착한 외계인 도우너. 금발에 까만 콩자반 같은 눈, 커다랗게 토끼처럼 튀어나온 앞니, 탄력적인 고무공 같은 동그랗고 빨간 코의 유쾌한 얼굴을 가졌다. 얼굴처럼 인상적인 붉은 보디슈트는 몸의 라인이 그대로 드러난다. 네크라인에 흰색 카라가 있어 자칫 수영복처럼 보일 수 있는 디자인을 보완해 깔끔하고 절제된 스타일을 만들었다.
도우너가 외계인의 전형적인 모습을 탈피하도록 구상한 작가는 캐릭터의 외모뿐 아니라 타임머신의 개념에도 새 바람을 일으켰다. 지구의 바이올린과 흡사한 모양의 '타임 코스모스'는 대중문화에 나오는 일반적인 우주선의 기체(機體)를 가졌다고 여겼던 타임머신에 대한 고정관념을 깬 경이로운 발상이다. 기계의 이름마저 시간과 우주를 직관적으로 생각나게 하는 명칭으로 듣자마자 입에 착 붙는다. 도우너의 고향이자 추임새로서 언급되는 '깐따 삐야'라는 말도 흔치 않은 억양의 조합으로 만들어져 미지의 우주 어딘가에 있을 그 행성을 상상하며 웃음 짓게 한다.
지구에 와 처음 본 둘리를 사람으로 여기고 진짜 사람은 애완동물로 잘못 인식하게 된 도우너는 사람의 나이에 상관없이 반말을 한다. 지구인의 기준에 도우너는 어린아이의 외형을 가지고 있어 어른에게 반말하는 버릇없는 아이로 인식되지만 나이로 따지면 2000살에 육박해 인간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세월을 살아왔다. 오랜 기간 고길동의 가족과 지내며 애완동물로 잘못 인식한 것을 바로 잡을 기회가 있었으리라 생각하지만, 상대방이 제대로 말해도 듣고 싶은 데로 듣는 도우너는 지구를 떠날 때까지 이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 대표적 예가 둘리가 희동이의 이름을 알려주는 장면이다. '희동이'라고 계속 얘기해도 '개동이'라고 받아들이는 모습은 자기중심적인 도우너의 성향을 잘 나타낸다.
고향에서 장군의 아들이라는 유복한 신분이지만 현재는 지구에서 타향살이하며 고길동의 집에서 신세 지는 객식구인 도우너. 한 번의 박치기로 콘크리트 벽도 부수는 돌머리이자 엄청난 괴력을 가졌다. 언제나 생각보다 몸과 행동이 앞서 쉽게 흥분하고 둘리와 함께 소동을 일으켜 기물 파손의 주역으로 길동에게 수시로 혼이 난다. 분에 못 이겨 거친 항의를 하기도 하지만 먹을 것을 주며 '둘리와 놀지 말라'는 길동의 회유에 쉽게 넘어가 금세 온순해지는 단순한 성격이다.
마이클 잭슨 같은 세계적인 가수를 꿈꾸는 가수 지망생 청년 마이콜은 고길동의 옆집으로 이사 오며 둘리와 알게 된다. 가수가 꿈이지만 안타깝게도 음치라는 치명적 단점과 노래에 재능이 없는 걸 본인만 모른다. 큰 키와 까무잡잡한 피부에 두툼한 입술과 라면처럼 꼬불거리는 심한 곱슬머리를 가진 이국적인 외모에 혼혈로 오해받지만 마 씨(氏) 성을 가진 토종 한국인이다.
둘리, 도우너와 함께 결성한 트리오 '핵폭탄과 유도탄들'로 가요제에 나가며 둘리가 초능력을 사용해 최우수상을 받게 되지만 이를 알리 없는 마이콜은 국내에서 해외로 활동을 넓혀야 한다고 생각하게 돼 라스베이거스 무대를 위한 연습에 더욱 매진한다. 전업 가수가 되기 위해 열창하고 영감이 떠올라 작사, 작곡을 하며 자작곡을 선보이는 모습은 작품에서 우스꽝스럽게 묘사해 재미를 주는 요소다. 하지만 언제나 '가수'에 진심인 그를 생각하면 짠한 마음이 든다. 시대를 잘못 타고난 비운의 인재랄까. 현시점에 태어났다면 코믹한 매력이 눈길을 끌어 SNS 스타로 대성했을지도 모른다.
미래의 스타로서 항상 준비된 자세를 가진 마이콜은 선글라스와 무대의상 재킷을 입고 구두를 신은 채 언제라도 무대에 올라 노래할 만반의 대기 상태로 다닌다. 추후에 둘리로부터 가수 말고 다른 일을 해보라는 진심 어린 조언을 듣지만 꿈에 대한 희망은 버릴 수 없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인다. 이런 마음에 신이 감동했는지 지구에서는 인정받지 못한 재능을 외계인이 알아보고 그들의 별에서 국민가수로 추앙받지만, 지구인 마이콜이 감당할 수 없는 문화적 차이로 인해 다시 지구로 귀환한다.
아프리카에서 온 귀족 타조로 자신을 소개하는 또치는 서커스단에서 도망 나온 암컷 타조다. 서커스단의 추적을 피해 고길동의 집 앞 쓰레기통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둘리를 만나게 되면서 멤버로 합류한다. 자신을 고귀한 신분으로 생각하며 둘리와 도우너를 '천민'이라고 격하해서 부르는 등 무례하고 허영기 많은 모습을 보여주지만 실상은 몹시 겁이 많고 소심해서 자신을 지키기 위한 방편으로 허세를 부리는 것이다. 타조의 신체적 특징인 풍성한 깃털이 없어 오리나 통닭으로 오인받기도 하지만 드넓은 '아프리카를 활보하다 온 타조'라는 혈통에 대한 자부심은 여러 고난 속에서도 기죽지 않고 또치를 다시 일으켜 새우는 원동력이다. 매끈한 몸에 있는 단 하나의 깃털은 엉덩이의 맨 끄트머리에 있는 꽁지깃으로 위급할 때 떼어서 무기(?)로 쓰고 다시 부착한다.
꽁지깃의 붉은 깃털 색깔과 동일한 목걸이는 꾸미기를 좋아하는 성격의 또치가 일반적인 타조와 비교해 자신에게 없는 깃털 볼륨을 대체한 똑똑한 액세서리다. 다른 이의 시선을 깃털이 없어 휑한 몸이 아닌 얼굴로 돌려주는 두툼한 목걸이는 단순한 링 형태로 또치가 사랑하는 나라 아프리카의 원주민들이 착용하는 토속적인 느낌이 난다.
억만 년 전 살았던 공룡 둘리나 우주에서 온 외계인 도우너와 달리 서커스단 생활을 하며 생업 전선에 뛰어든 경험으로 자본주의 사회를 잘 알고 있는 또치. 갈수록 늘어가는 군식구에 생활비 지출이 많아져 길동 하우스의 재정 상태가 어렵다는 걸 아는 돈에 대한 현실 감각이 있는 유일한 캐릭터다.
주인공 둘리의 라이벌(?)이자 양대 산맥의 비중과 인기를 갖고 있는 캐릭터 고길동. 40세의 회사원으로 쌍문동에 마당 있는 단독 주택을 소유하고 아내 박정자와 고철수, 고영희 남매를 부양하는 능력 있는 가장이다. 취미는 기보를 보며 바둑두기, 값비싼 양주를 모아 진열하고 마시기, 낚시, 화단 가꾸기, 음악감상 및 레코드 수집 등 다양한 활동을 즐길 정도로 재력이 좋은 것을 알 수 있다.
주방엔 현대식 싱크대에 가스레인지와 냉장고가 있고 소파와 식탁 등의 가구가 잘 비치된 것은 물론 TV와 전축도 있다. 실내에 양변기와 욕조가 있는 화장실을 갖추고 빨래를 짜기 위한 탈수기까지 있는 넉넉한 생활환경을 보여준다. 좋은 집에서 가족들과 오순도순 잘 살고 있었지만 딸 영희가 주워온 이상한 동물 둘리가 함께 살게 되면서 평안하던 생활에 종지부를 찍게 된다.
둘리를 시작으로 희동, 도우너, 또치가 차례로 객식구로 합류하면서 벌이는 갖가지 소동에 쌍문동 주택은 하루도 조용할 날 없이 늘 쑥대밭이 된다. 스트레스로 단기간에 살이 10kg이 빠질 정도로 고생한 길동은 사고를 수습하고 둘리와 친구들을 단속하느라 어느새 눈썹을 구기며 늘 인상 쓰고 호통치는 게 일상이 되어버렸다.
코흘리개 적 보았던 <아기공룡 둘리>에 '고길동'은 둘리와 친구들을 괴롭히던 악역의 대명사였다. 어찌나 그렇게 괴롭히고 구박하던지 악당 중의 최고 악당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길동과 같은 어른으로 비슷한 나이가 된 시점에 다시 만난 그는 악인이라 부르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사회인으로 직업을 가지고 일을 하며 맡은 바 업무에 충실하고 그렇게 번 돈으로 본인을 포함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다. 4인 가족이 둘리를 만나며 차례대로 식구 수가 늘더니 급기야 10명이 된다. 직계가족을 제외한 나머지 여섯은 조카 두 명, 빙하에서 깨어난 공룡과 외계인 둘에 아프리카에서 온 타조까지 너무나 다이내믹한 구성이다. 많은 인원으로 식비 지출 부담이 곱절을 뛰어넘었으며 다들 어찌나 매사에 호기심이 많은지 놀다가 살림살이를 깨부수는 건 예사로 밖으로 나갔다 사건에 휘말려 기물 파손으로 손해배상까지 종종 하게 된다. 이제 길동의 인생은 바람 잘 날 없다. 평범한 생활은 불가한 것으로 일을 마치고 돌아와 쉬면서 가끔 취미를 즐기는 담담한 일상은 먼 나라 얘기가 된다.
늘 인상을 쓰는 통에 미간에 세로 주름이 가고 눈썹이 一 (한 일) 자로 붙어 보이며, 락커 못지않은 고음으로 소리 지르던 모습은 좌충우돌 벌어지는 객식구들의 해프닝을 단속하고 수습해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10인 가장의 삶에 무게를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그가 수많은 소동 속에 벌어진 피해의 울분을 발산하지 않고 어른으로서 무조건 인내하기만 했다면 아마 화병으로 제 명을 다 못 살고 죽었을지도 모른다.
10인의 대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열심히 직장 생활에 매진하는 길동은 회사로 출근할 때 넥타이를 매고 정장을 입으며 구두를 갖춰 신는다. 날이 좀 쌀쌀하면 정장 위에 심플한 맥코트를 걸치고 전형적인 샐러리맨의 복장을 준수한다. 당시(1983년~1993년 연재 시기)는 엄격한 사내 분위기가 있었던 시대로 회사원이면 대부분 남자는 바지 정장과 여자는 치마 정장을 입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휴일에도 바쁜 업무에 출근하는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그는 고된 업무가 끝나고 퇴근 후 집에 오면 정장을 벗어 캐주얼한 복장으로 갈아입는다.
과장이자 한 가정의 남편이고 아빠인 길동의 위치는 캐주얼한 복장에서도 출근 시 입는 정장처럼 단정하고 깔끔한 스타일을 보인다. 카라가 달린 긴팔 티셔츠에 니트 베스트를 레이어드 하거나 폴로셔츠 형태의 반팔은 앞 주머니가 달려 있어 실용적이기도 하다. 그가 정장과 캐주얼에 상관없이 모든 옷에 매치하는 벨트는 '고길동 아저씨 패션'의 백미로 만화 초기부터 자주 보이는 아이템은 사각 버클의 중앙에 검은 가죽이 덧대어졌다. 오래전부터 아빠들이 선호해 온 디자인으로 현재도 '아빠 벨트'라고 검색창에 치면 나오는 바로 그 모양을 늘 착용한다. 밖에서 구두만 신는다면 집에선 발가락이 시원하게 나오는 슬리퍼를 신는다. 회사에서 활동할 땐 정장을 입고 동네에선 댄디한 캐주얼로 말끔한 옷차림을 유지하지만 신발만큼은 개방감 있는 슬리퍼를 신어 생활에 편안함을 보충하는 것이다.
둘리와 그 친구들에게 맨날 사고만 치고 밥만 축낸다고 말은 그렇게 해도 미우나 고우나 내 집에 온 손님이자 식구로서 함께 살 수 있었던 건 집안의 가장 길동의 이해와 배려가 있기에 가능했다. 객식구들이 점점 늘어나면서 전에 했던 다양한 취미 생활을 못 하고 회사일과 집안 소동 뒤치다꺼리를 병행하면서도 늘 말쑥한 40세 남성의 스타일을 지켜왔던 그는 옷을 잘 입고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에겐 특히 아끼는 바지가 있다. 각진 뒤 포켓이 멋진 '게스 청바지'. 쉬는 날 낮잠을 자거나 화단을 가꾸는 등 혼자만의 시간에 소소한 행복을 느낄 때 입었던 옷. 데님의 파란색이 청량함을 더해 기분전환도 되었던 집에서 뽐내는 멋 내기용이었다. 하지만 어느 날 옷장에서 게스 청바지를 입으려고 찾는데, 아내가 처남에게 주어 지금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순간 길동에게 속상한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1981년 마르시아노 형제들이 론칭한 데님 브랜드 게스(GUESS)는 아메리칸드림으로 자본주의의 성지와 같던 미국에서 사업을 시작한다. 프랑스에 뿌리를 두었던 창업자들에 의해 유럽 데님 패션에 영향을 받았으며 청바지의 발상지인 미국의 스타일에 맞게 재해석한 미니멀한 느낌을 표현해 각광받는다. 그중에서도 스톤 워싱을 한 슬림 핏 데님은 게스를 대표하는 히트 아이템이다.
게스 청바지 하면 단번에 떠오르는 역삼각형 모양의 로고 라벨은 오른쪽 뒤 포켓에 부착되어 브랜드의 아이덴티티를 상징한다. 국내엔 1989년부터 진출했던 게스 청바지는 멋을 아는 청소년들과 어른들이 기꺼이 비싼 돈을 주고 사 입었던 인기 절정의 옷으로, 스톤 워싱으로 자연스럽게 물이 빠진 데님에 부착된 게스의 역삼각형 마크는 그야말로 청춘의 표상이었다. 길동의 데님은 단순한 그림의 명랑만화에 특성이 더해저 옷의 모양이 자세히 보이지 않는다. 이 또한 브랜드의 상징인 퀘스천 마크처럼 생략된 옷의 표현에 궁금증을 불러일으켜 오히려 게스 청바지스러움을 잘 표현해낸 거라고 여겨진다.
운명인가, 우연의 일치일까? 마흔 살 길동이 속한 세상 <아기공룡 둘리> 발간 40주년에 그가 아끼던 게스 청바지도 어느덧 브랜드 설립 40주년을 넘겨 함께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었다. 패션 브랜드가 헤리티지를 쌓으며 다른 세대를 이어가듯 캐릭터가 만화의 세계에서 영원한 생명을 만들고 시대에 따라 변주할 수 있는 것은 세월의 흐름에 새겨진 이야기의 힘이다.
저마다 다른 개성을 가지고 태어난 개인은 나로서 일생을 가꾸며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든다. 주어진 상황에 따라 영향을 받고 좋거나 나쁘거나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모른다. 타인과의 연결은 새로운 관계를 만들고 각자가 다르기에 이어지며 만들 수 있던 새로운 날들. 결코 동일할 수 없는 본연의 특성은 존재 자체로 이미 특별하다. 휘황찬란하지 않아도 부족하다 느끼지 않는 것은 서로를 포함한 얘기 속에 보완할 수 있는 충만함이 솟아오르기 때문이다. 살아가기에 이야기는 지속되고 만남은 정체되지 않아 또 다른 연결을 접할 수 있어 쓸쓸하지 않다. 홀로 태어났지만 너와 내가 만나 우리가 될 수 있는 신비. 그 만남은 세월에 아로새기는 모든 얘기이자 삶의 역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