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인간관계의 정의에 대한 물음에 '시절 인연'이란 말이 단골손님처럼 등장했다. 모든 사물의 현상은 시기가 되어야 일어난다는 뜻을 가진 불교 용어로 근래 '인연에는 때가 있다'는 뜻으로 통용되어 널리 사용되고 있다. 현대인에게 시절 인연의 후천적 의미가 깊게 와닿은 것은 인간관계로 파생된 괴로움이 인력(人力)으로는 어쩔 수 없음의 여지를 주기 때문이다. 나의 만남과 헤어짐도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에 불과하다고 달래주는 참으로 마법 같은 말이다.
태어나 혈연이 만든 가족을 시작으로 대인 관계의 첫발을 내딛고, 입이 트이면서 거주지를 거점으로 동네와 또래 집단이 모인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서 본격적으로 타인과 만난다. 이렇게 사회적 무리에 포함되며 이뤄진 사귐은 친구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가족이 좋아하는 사람의 전부였지만 친구를 사귀고 친해지면서 어느새 부모님보다 더 좋아하는 시기가 찾아온다. 아동 전문가들에 의하면 그 시기는 대략 초등학교 3~4학년부터로 사춘기가 시작되기 이전부터 한 사람에게 '친구'는 커다란 영향력을 갖는다. 질풍노도의 사춘기가 찾아오면 나를 둘러싼 모든 것에 호기심과 의문이 물밀 듯이 밀려오고 내면과 외면이 혼돈 속에 무럭무럭 자란다. 이 와중에도 친구는 학교에서 오랜 시간 붙어 있으며 형성된 친밀함으로 가족에게조차 말할 수 없는 속 깊은 얘기를 하는 존재가 된다.
'베스트 프랜드'는 나의 인생 최대 고민과 비밀도 공유하는 사이다. 내 마음에 가장 인접한 위치에서 대화하고 경청해 주기에 그 대상이 가지는 의미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영화 <스탠 바이 미>에서 크리스는 또래 아이답지 않은 조숙함과 기민한 성격으로 친구들 사이에 터프가이 리더로 불린다. 그러나 내면은 폭력적인 가족과 어른들의(동네 주민과 학교 선생님) 편협한 시선에 상처받아 흐느낀다. 이런 크리스의 상처에 깊이 공감하며 위로하는 고디는 그의 가장 친한 친구다. 고디 역시 가장 친한 친구인 크리스에게 친형의 죽음으로 부모님에게 무관심과 방임의 대상이 되어 슬픈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며 위안받는다. 고디의 글쓰기 재능을 알고 있는 크리스는 꾸준히 독려하며 친구가 작가의 꿈을 잃지 않도록 용기를 준다. 서로의 아픔을 내보여도 부끄럽지 않고 진심을 나누는 친구가 있어 두 사람은 외롭지 않다.
세상에 가족의 빈자리를 대신하는 존재를 떠올릴 때 친구라고 대답할 수 있다면 그 또한 크나큰 행복일 것이다. 만화 <사바스 카페>에서 다이는 유복자로 태어나 어머니 마저 10대에 잃고 혼자가 된다. 재미 삼아 만든 게임 소프트가 전 세계적으로 히트하면서 자수성가한 소년 재벌이 되지만, 어려서부터 혼자 사는 법을 터득해야 했던 성장 배경으로 사람들 안에 섞이지 못하고 스스로도 사랑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다이는 난생처음 다닌 학교에서 알게 된 친구들과 우정을 나누며 사람 간의 소통을 배운다. 본인을 사랑하는 법도 조금씩 깨닫게 되면서 그동안 애써 외면했던 가족이 없어 공허한 마음도 채워짐을 느낀다. 아무런 꿈과 희망도 없이 살던 소년의 마음에 스며든 친구는 자신 또한 타인에게 좋은 친구가 되고 싶다는 열망을 품게 하며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을 맞는다.
생각해 보면 운명이라 여겨지는 친구들과의 만남도 있다. 만화 <아기공룡 둘리>에서 초능력을 가진 아기공룡 둘리, 슈퍼 파워 베이비 희동, 시간 여행자 외계인 도우너, 아프리카에서 온 타조 또치 등 도무지 상상할 수 없던 조합의 아이들이 한 집에 모여 친구가 되는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처럼.
친구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된 그들은 함께 있을 때 두려울 것이 없다. 남들에게 못난이들의 대잔치로 불릴지언정 우리 안에선 서로를 보살피고 응원해 삶을 지탱하는 공동체를 이룬다. 나를 지지하는 친구들이 있기에 자존감을 잃지 않고 내 멋에 살 수 있는 힘이 솟는다.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지나 어른이 되기까지 내게 주어진 배경과 노력, 운이 작용하며 각자의 삶에 다양한 변화가 찾아온다. 가족과 떨어져선 살아도 이 친구 없인 못 살겠다 느꼈던 감정도 그때와 다르게 희석되거나 의미를 잃어 단절을 택하기도 한다. 사회생활을 하며 인간관계는 더 늘어 가지만 왠지 모르게 풍요 속 빈곤을 느끼는 나를 보게 된다.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라고 말하던 유행가의 가사처럼 필연일 수밖에 없던 우정의 시간은 친구라는 이름으로 너와 나의 소중한 기억을 저장했다. 내게 주어진 그 시기에 때맞춰 나타난 시절 인연, 기쁘고 슬펐던 순간들을 같이 한 사람. 지금은 멈춰진 관계라 해도 서로의 삶에 새겨진 동행의 기억이 남아 슬프지 않다. 지나 보니 모든 것이 그 자체로 찬란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