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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한 가입 규칙

도발적 가설 모임으로의 초대

by 푸른알약


반갑습니다. 여기, 소서재까지 오셨다는 건, 적어도 호기심이 보통인 분은 아니라는 뜻이겠죠. 모임에 대한 소개를 하기 전에 좀 더 편한 자세를 취해주세요. 이야기가 좀 길어질지도 모르니까요.


제가 알기로 이 모임은 처음에 고지능자의 협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협회에는 세상의 다양한 것에 호기심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있는 만큼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을 포착해 내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그 이상한 점을 다른 사람들에게 공유하고 나면 또 자연스럽게 그걸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 보자 하고 논의를 이어가는 경우가 잦았다고 하더군요.


그중에 활동량이 많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소모임이 결성되면서 더 적극적인 활동이 이루어졌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인지라, 논의가 불필요하게 확장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곧이어 가설은 검증이 가능한 것으로 한정한다는 규칙이 생겼고, 덕분에 논의는 체계가 잡히고 좀 더 학술적인 형태로 자리 잡아서 반증가능성을 포함한 검증방법이 가설에 포함되어야 한다는 규칙으로 발전했다죠.


이 규칙은 가설을 세울 때에는 제약이 되었지만, 한편으로 이상한 점을 발견하는 데는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기존의 이론이나 학설이 설명할 수 없는 점을 찾아내는데 관심을 더 집중할 수 있게 만들었다나요. 그래서 그런지 고안해 낸 가설이 점점 설득력을 가지게 되고, 얼마나 많은 회원들이 그 가설에 납득하는지를 확인하는 절차가 생겼습니다. 이걸 우리는 총회라고 부르네요.


먼저 이상한 점을 발견한 회원과 거기에 관심을 가진 회원들이 소모임을 꾸려서 가설을 고안합니다. 소모임의 구성원 전원이 그 가설에 납득하면, 총회에서 이를 안건으로 발표할 수 있어요. 총회에 참석한 회원들이 납득 여부를 개별적으로 투표해서 가설에 점수가 매겨집니다. 여기서 과반을 넘기지 못한 가설은 보류 판정을 받고, 과반을 넘은 가설은 공식적으로 채택되어 파일링되죠. 우리는 이 파일을 일컬어 ‘덕트멘터리(ductmentary)’라 부릅니다. 사실의 기록, 다큐멘터리(documentary)가 아니라 추론의 기록이죠.


그런데 이 파일에는 전원 납득 판정을 받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만큼 대단히 설득력을 가진, 그러니까 아니라고 부정하기가 매우 어려운 가설들이 있다는 것이죠. 이 등급의 가설은 아마도 많은 회원들이 사실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검증방법이 가설에 공식적으로 포함되어야 하기 때문에 만약에 마음을 먹는다면 가설은 검증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걸 검증하는 건 금기로 남아있습니다.


그건 이 모임이 고지능자 협회에서 완전히 분리되어 독자적인 활동을 하는 것과 관계가 있어요. 분리되기 직전에 어떤 가설이 너무나 강력한 설득력을 가지는 바람에 실제 검증트랙을 태워보자는 논의가 거세진 경우가 있었다 합니다. 찬반이 갈린 상태에서 일부 회원이 몰래 논문화해서 실제 검증을 시도했는데, 그것이 사실로 밝혀진 탓에 그 성취를 누구에게 귀속시키느냐의 문제로 모임 내에서 극한의 이전투구가 생겼다고 하더군요.


그 과정에서 환멸을 느낀 회원들이 그룹과 협회에 결별을 고하고 따로 떨어져 나와서 만든 것이 바로 이 모임입니다. 그래서 가설의 검증시도는 엄격한 금기가 되었고 시도 자체만으로도 회원의 자격은 박탈됩니다. 갈라져 나올 당시에 기존의 덕트멘터리의 소유권 문제가 제기되었는데, 잔류한 인원들이 회원 가입하기 이전에 파일링된 가설에는 아무런 기여를 한 것이 없으므로 그 부분을 분할해서 들고 나오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고 하죠.


그런데 잔류한 인원들은 거의 다 신규 회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몇몇 가설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덕트멘터리를 이 모임에서 보관하고 있죠. ‘전원 납득’ 판정을 받은 파일이 아니라면 회원가입 기간의 경과에 따라 점수가 낮은 파일부터 점차적으로 열람할 수 있습니다. 물론, 아슬아슬하게 과반을 못 넘긴 가설 중에도 흥미로운 것들이 많이 있죠. 그런 파일은 새로운 가설을 세워서 총회의 안건으로 다시 제출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다만 소모임의 구성인원이 이전의 두 배가 되어야 한다는 규정 때문에 그리 쉽지는 않아요.


그래서 회원분들은 가설을 세우는데 집중하는 분들과 새로운 이상한 점을 발견하는 데 집중하는 분들로 성향이 좀 나뉘기도 합니다. 물론 대부분의 회원들이 이상함의 발견과 가설의 수립이라는 활동을 동시에 하는 편이네요. 그래서 최소한 이 모임에서 활동하시려면 기존의 회원들에게 자신이 발견한 ‘이상한 점이 도대체 왜 이상한가?’를 납득시킬 수는 있어야 합니다.


다른 모든 회원들에게 그 점을 납득시키기 전에 저를 먼저 납득시키는 것, 그것이 이 ‘도발적 가설로의 한 걸음’의 준회원 자격 부여의 조건이랍니다. 저는 일종의 문지기인 셈이죠. 그러니까 모임에서 활동하고 싶으시다면 먼저 ‘세상의 이상한 점’을 찾으셔서, ‘그게 왜 이상한지’를 저에게 설명하시고 납득시키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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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리즈글의 모든 등장인물, 사건은 픽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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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